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19: 에리곤호, 대만 지나 정해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07 ㅣ No.2017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19) 에리곤호, 대만 지나 정해로


마닐라 체류 중 조선어 문법서와 교리서 편찬에 정성 기울여

 

 

오늘날 마닐라 라테라노 성 요한 대학.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이곳에서 2개월 간 머물며 조선어 공부와 교리서 편찬 작업을 했다.

 


마닐라에서 2개월간 체류

 

메스트르 신부는 1842년 4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마침내 에리곤호가 오늘 저녁에 돛을 펴고 출항한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오늘 아침부터 배에 오르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 때문에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호를 타고 마닐라를 떠난 날짜를 1842년 4월 19일로 기록해 왔다. 김대건 신부의 연보와 가톨릭대사전, 심지어 김대건 신부 관련 연구 논문까지 그대로 인용됐다. 그런데 지난 8월 17~19일 솔뫼에서 열린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대만대학 남지우 교수는 「에리곤호 항해일지」를 근거로 에리곤호가 마닐라 항을 출발한 날이 1842년 4월 21일이라고 바로잡았다.

 

필자도 이번 호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잘못을 하나 바로 잡고 시작하려 한다. 필자는 본지 1626호(8월 22일 자) 연재 글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선발된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의 출생 연도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고인이 되었지만,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대학자의 논문 등 여러 글에 이재의가 1785년생으로 나온다. 앵베르 주교가 밝힌 32세 홀아비와는 나이 차가 너무나 의문스럽다고 한 것이다. 다행히 이 글을 읽은 이승훈(베드로)의 6대손 이홍균(요셉)씨가 평창 이씨 족보를 들고 왔다. 이 족보에는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가 1808년 무진년 11월 25일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1834년 부인 경주 이씨를 상처했다고도 적혀있다. 이 족보로 정하상에 이어 앵베르 주교에게 선발된 32세 홀아비가 이재의 토마스가 분명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그의 출생연도도 이제부터 1785년이 아닌 1808년생으로 바로 잡혀야 할 것이다.

 

프랑스 프리깃함 에리곤호가 1842년 2월 16일 마카오를 출항해 겨우 3박 4일간의 항해 후 2월 20일 마닐라에 정박한 후 2개월간 체류한 이유는 뭘까? 표면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눈병이 악화된 세실 함장의 건강이 회복할 때까지 항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밝히지 않은 진짜 이유는 에리곤호의 다음 목적지인 중국땅 정해(定海)와 영파(寧波), 진해(鎭海)에서 아편전쟁이 한창이었다. 세실 함장은 이 세 지역에서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 4월 21일 마닐라를 출항해 자유 무역항인 정해를 향해 항해를 재개했다.

 

 

메스트르 신부 조선어 공부

 

에리곤호가 마닐라에 정박해 있는 동안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는 마닐라대교구장 호세 마리아 세귀 대주교의 배려로 김대건과 라테라노의 성 요한 신학원에 머물렀다. 메스트르 신부는 이곳에서 김대건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처음에는 두서없이 조선인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익히다 보니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라틴어 문법처럼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익히고 품사와 시제를 정리하여 일종의 ‘조선어 문법서’를 만들어 가면서 우리말을 공부했다. 또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를 정리해 우리말을 익혔다. 둘이서 협력해 문법과 단어장을 만들어 가면서 진행한 조선어 수업은 큰 효과를 냈다. 이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말 공부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또 이 시기 교리서 편찬 작업을 진행했다. 김대건은 한문 교리서를 갖고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도 김대건에게 여행 중에 틈틈이 신학을 가르쳐야 했기에 라틴어와 프랑스말로 된 신학 서적을 챙겨 왔다. 그럼 이 둘이서 만든 교리서는 어떤 책일까? 아쉽게도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조선 신자들을 위한 ‘한글 교리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함께 조선말 공부를 하면서 서양 글과 한문으로 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펼쳐놓고 우리말 교리서를 집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교리서 편찬 일도 많이 진척시켰는데, 저는 그가(김대건) 대부분이 한자인 교리서를 그것도 일부만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842년 4월 19일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는 메스트르 신부의 단 한 문장으로만 당시 상황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2개월간의 마닐라 체류 시절을 알려줄 김대건 신부의 두 번째 편지가 유실돼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일간의 긴 항해

 

에리곤호는 메스트르 신부가 밝힌 4월 19일이 아니라 4월 21일 마닐라를 출항했다. 이후 19박 20일의 긴 항해 끝에 5월 11일 주산열도(舟山列島)의 정해에 정박한다. 김대건 일행이 에리곤호에 승선한 후 최장기 항해였다.

 

에리곤호는 4월 29일에서 5월 4일까지 6일에 거쳐 대만 해안을 지나갔다. 항해일지에는 에리곤호가 4월 29일부터 5월 1일 오전까지는 대만 서안을 따라 남해안으로, 1일 오후부터 2일 오전까지 대만 중남부에서 북부까지 운항했다. 항로는 해안에서 약 10㎞ 거리를 유지했다. 날씨는 5월 2일 오전까지 좋아 에리곤호에서 대만 해안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이후 2일 오후 3시께부터 3일 오전까지 풍속 50~61㎞/h의 강한 북동풍이 불어 역방향으로 항해했고, 파고도 6~9m나 돼 운항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김대건은 대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마닐라를 떠나 순풍을 따라 항해해 대만 섬까지 다다랐으나 거기서부터는 작은 폭풍우와 역풍을 만났습니다.…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산도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가 우리에게 생선을 팔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1842년 12월 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김대건 일행은 대만에 정박해 섬 주민들을 만났을까? 항해일지에는 에리곤호가 대만에 정박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김대건은 느리게 운항하는 배를 발견한 원주민 어부들이 생선을 팔기 위해 에리곤호에 접근하면서 그들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남지우 교수는 “에리곤호가 대만에 정박하지 않은 것은 아편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쟁 중에 요새화된 섬에 군함이 들어가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에리곤호가 대만에 오기 직전인 1842년 3월 11일 주산에서 마카오로 가던 앤호가 풍랑을 피해 대만 중부 대안현으로 운항했다가, 중국 관리가 암초가 있는 강으로 유인해 배를 좌초시켰다. 이때 청군은 영국인 수십 명을 살해하고, 54명을 포로로 체포한 바 있다. 앤호 선장을 제외한 모든 포로는 남경조약 후 청나라 도광제의 명에 따라 모두 참수됐다.

 

이처럼 당시 대만은 서양 배가 항해하기에는 위험한 지역이었기에 에리곤호는 정박하지 않고 첫 목적지인 영국군 기지가 있는 자유 무역항 정해로 곧장 항해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5일, 리길재 기자]



98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