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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57: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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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27 ㅣ No.1457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7)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목가적 풍경 이면에 담겨진 19세기 농민들의 팍팍한 삶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857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파리.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불어닥친 혼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은 이탈리아 반도에는 통일을, 교황에게는 교황령의 종식을 가져왔다면, 프랑스에는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그로 인해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00년대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 대혁명이 남긴 자취로 몸살을 앓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이념(자유, 평등, 형제애) 중 하나로 등장했던 자유주의의 영향은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안에선 나폴레옹에 의한 제1 제정이 시작되고,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에 맞서 전쟁을 치르느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이어 러시아와 전쟁을 했고,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내린 ‘대륙봉쇄령’은 결국 자신이 몰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간 뒤, 살아남은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를 국왕으로 왕정이 복고(復古)되지만, 시민들을 의식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했다. 노동자와 농민 등 하위계급에도 온건적인 정책을 펴 정치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샤를 10세가 왕이 되면서 혁명 정신에서 벗어나 특권 정치로 후퇴했고, 1830년 7월 프랑스는 다시 봉기하여 샤를 10세를 추방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루이 필리프 1세가 국왕으로 즉위(1830년)하면서 다시 입헌군주제에 자유주의 정책을 펴지만, 시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부 힘 있는 부르주아(자본가) 계층에만 선거권 등 각종 특권을 주는 바람에 1848년 2월 프랑스는 또다시 혁명의 깃발을 들어야 했다. 결국, 루이 필리프도 영국으로 도망가고 프랑스의 정치는 왕정복고 체제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갔다.

 

1848년 제2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뽑힌 루이 나폴레옹은 힘으로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1852년 국민투표에 부쳐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제2 제정을 열며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 대혁명과 2월 시민 혁명을 겪은 프랑스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하며 혁명의 정신을 구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내부 정리보다는 대외 팽창에만 주력하다가 급기야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수모를 겪더니 패전국이 되어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독일의 감정이 악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마저 실각하자 프랑스 사회는 왕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했고, 사회 분위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격동의 시기, 종교와 혁명

 

그 격동의 시기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 온 가톨릭교회도 여러 수모를 겪다가 결국 붕괴를 면치 못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실로 다양했고, 규모도 컸다. 성직자 민사기본법, 선서, 탈그리스도교화 등으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끝없이 수난을 당했다. 성직자 민사기본법과 선서를 거부한 신부들은 절반가량이 망명을 떠났고, 나머지는 갖은 핑계로 형벌에 처해 졌다. 탈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면서 선서한 신부들도 처벌을 면치 못했다. 그 바람에 절반은 사제직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났고, 성당은 폐쇄되고 미사는 금지되었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어떤 형태건 모두 파괴되었다. 야만적인 반달리즘은 교회 미술을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었다.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프랑스 대혁명이 ‘선언’한 ‘자유’는 종교와 약자들의 자유는 철저히 배제된 것이었고, ‘인권 선언’이라는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정작 ‘인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또 다른 앙시앵 레짐(Ancien Rgime)이 탄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종교에 대한 박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유다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향한 칼날이었고, 이제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종교를 대신하여 또 다른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신념은 기존의 종교와 다를 게 없었기에 마치 두 종교가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혁명가들조차 “두 광신의 대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종교(혹은 신념)는 ‘다른’ 종교와의 양립을 거부했고 그런 점에서 혁명은 구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옹호한 계층에서 여성과 농민, 노동자 등 정작 혁명이 필요했던 계층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고, 계층 간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농부들 일상을 종교적 분위기로 승화시킨 작품들

 

소개하는 작품은 너무도 잘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이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원래 1854년에 세로 형태로 그렸던 것의 두 번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밀레는 프랑스 그레빌-아그(Gr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이웃의 가난한 농부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다. 그는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도움으로 라틴어와 근대문학을 배웠고, 성인들의 생애에 감명을 받아 데생으로 종교화를 그리곤 했다. 1833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셰르부르-옥트빌(Cherbourg-Octeville)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4년 뒤 파리로 옮겨 에콜 데 보자르(cole des Beaux-Arts)에서 공부하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후 파리, 셰르부르, 르아브르(Le Havre)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다가 1849년 이후엔 파리 인근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그곳 농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

 

밀레는 자신이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훗날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로 승화시켜 사실주의(Realism), 자연주의(Naturalism) 색채로 그렸다. 이 그림들은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사회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그만큼 많은 비평과 함께 밀레의 명성과 성공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그 결과 1860년대와 1870년대는 그에게 영광의 시기였다. 밀레는 1875년 결핵으로 바르비종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추수 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다. 농촌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저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 여인들의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파리 외곽 바르비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농촌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동작을 세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풍성한 수확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다. 허리가 아픈 듯, 한 손을 등 뒤에 올리고, 거친 손으로 바닥을 뒤적여 찾아든 것은 몇 안 되는 이삭이다. 수확철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땅 없는 이들의 삶의 현장을 그린 것이다. 이들에게 이삭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진 빵 조각’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다.

 

당시 프랑스는 당국의 허가 없이는 이삭도 주울 수 없었다. 이삭을 줍는 여성은 극빈 계층의 사람들이다. 가난한 프랑스 농민들을 대변하듯, 세 여인의 굽은 등을 비추는 지는 해의 여운과 달리, 멀리 뿌연 안갯속에서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게 그린 풍성한 수확과 말을 탄 지주가 대조를 이룬다. 이런 극적인 대비로 인해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선동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밭은 더없이 넓고 크지만, 궁핍한 근대 민중들의 삶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한 톨의 밀이삭에만 집중할 뿐이다. 밀레가 바라본 19세기 프랑스 농부들의 삶의 진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과 제1, 2 정부를 거치며, 혁명으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의 대가 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현실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다. 혁명가를 자처했던 정치인들이 불편하게 여겼던 작품인 이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24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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