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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1: 조선 본토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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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15 ㅣ No.2067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1) 조선 본토에 도착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 도착, 드디어 조선 본토에 발 디뎌

 

 

김대건 신부 일행은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은진현 강경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 11명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 교회에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경 부근 황산포 나바위 성지 전경.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목적지는 어디인가

 

김대건 신부 일행은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은진현 강경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해 그해 4월 30일 한양에서 출발한 지 165일, 사제품을 받고 8월 31일 상해에서 귀국길에 오른 지 43일 만이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 11명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 교회에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 11명이 계획했던 원래 조선 입국지는 한양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한강 어귀 해안이었다는 게 지금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는 물론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자신이 조선대목구 대표 신부로 지목한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이 편지에서 “저희는 조선의 군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는데 얼마 뒤에 김대건 신부는 섬들을 알아볼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조선의 수도까지 이어지는 강의 하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저희는 서울로 가지 않기로 하고 동시에 남부의 첫째 도의 북쪽 작은 강변에 위치하고 하구에서 내륙 쪽으로 6리(약 24㎞) 들어간 강경 포구에 가서 정박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최근 신앙을 받아들인 새 신자 몇 가족이 있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페레올 주교의 이 글대로라면 입국지가 제주도 표착 이후 은진 강경으로 갑자기 변경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말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계획했던 조선 입국지가 한강 어귀였을까? 최근 몇몇 학자들은 ‘강경’이 원래 입국 목적지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조심스레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학자들은 그 근거로 첫째, 김대건 부제가 조선 신자들과 중국으로 떠나기 전 사전에 현석문을 통해 충청도 해안가에 집 한 채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 둘째, 김대건 부제가 한양 돌우물골에 106일 동안 머물면서 은진(강경) 객주 구순오와 교류를 했다는 점. 신자인 구순오는 중국 은괴를 녹여 조선 은괴로 만드는 기술도 갖고 있었고, 제법 부자여서 여러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너른 집도 있었다. 셋째, 김대건 신부 일행을 은신시키기 위해 온 은진 신자가 서양 선교사들을 위한 상복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점. 넷째, 다블뤼 신부가 배에 내리자마자 바로 공동 교우촌으로 데려갔다는 점. 다섯째, 조선 신자들이 5개월여 만에 다시 배를 타고 제물포나 한양에 도착한다면 그 소문이 퍼져 서양 선교사들이 곧바로 발각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여섯째, 김대건 신부 일행이 산동성에서 약 100여 ㎞ 떨어진 지점에서 서해 군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는 점 등이다. 아직 이에 관한 학술 연구가 기초 단계에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들의 연구 성과가 하루빨리 공개되길 기대한다. 그럼 이제부터 은진 강경 도착 과정을 살펴보자.

 

 

강경포 앞 황산에 닻 내려

 

김대건 신부 일행은 1845년 10월 12일 주일 저녁 8시께 은진 강경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다. 하선하기 이틀 전인 10월 10일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은진 교우들에게 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한 사람을 육지로 보냈다. 그는 아마 은진 객주 구순오와도 교분이 있고 중국으로 떠나기 전 선교사들을 위한 집을 구하기 위해 이 지역을 들렸던 현석문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발각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라파엘호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딸려 있었지만 중국 배여서 의심을 살 염려가 있어 인근에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불러 육지를 보낼 사람을 태우기로 했다. 그런데 라파엘호에 접근한 뱃사공 중의 한 명이 라파엘호로 와서 모든 것을 살펴본 것이다.

 

“우리 배는 멀리서 왔으며 돛대들은 조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 안에는 중국 담뱃대들이 있었고 굵은 밧줄도 아주 낡아 있는 등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 선원은 온갖 꾀를 다 부려야 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거의 사실이 아니지만, 완전히 거짓도 아닌 이야기를 하고는 곤경에서 빠져나왔습니다.”(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공동 교우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기를 넘겼다. 은진 강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은 암초가 많았다. 그래서 이 지역 뱃사람들은 암초들이 있는 곳에 장대를 꽂아 위험을 표시해 두었다. 임성룡으로 더 알려진 임성실과 노언익 등 네 명의 뱃사람은 이 표식을 따라 라파엘호를 몰아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곳에 닻을 내렸다.

 

이 외딴곳은 어디일까? 1955년 10월 화산 나바위성당에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비가 제막 되고 성지로 조성되면서 ‘화산 나바위 아래’가 김대건 신부 일행이 입국한 장소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886년 11월 3일에 열린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에서 최양업 신부의 동생 최선정(베드로)은 “강경이 황산 동네에 내리시며…”라고 증언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100회차 참조) 또 김후상 신부는 신자들과 그 후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1953년에 저술한 「천주교 전주교구 화산 천주교회 약사」에서 “강경포 앞 황산에서 닻을 내리었다”라고 기록했다.

 

18세기 중엽에 제작한 ‘은진지도’로 서율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다.

 

 

상복 입고 조선 땅 밟은 선교사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중 ‘은진지도’를 보면 강경은 은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너른 들판 가운데 강경산(오늘날 옥녀봉으로 부름)이 있고, 그 좌우로 천이 흐르며, 뒤로는 금강이 바다와 닿아 있다. 강경천에는 조선 영조 때 만든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미내(渼奈)다리가 있고, 그 인근에 황산 동네가 있었다. 망성면 화산리의 화산 끝 나바위 아래에는 나암창이 있었는데 1872년 이후 ‘황산창’으로 불렸다.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는 “나암창을 황산창으로 개칭한 이유는 이곳이 황산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전주교회사」 1권 453쪽 참조)

 

문제는 1845년 당시 강경 황산은 전라도 여산도호부 북일면 황산리에, 나바위는 여산도호부 북일면 나암리에 속했고, 두 곳은 직선거리로 약 2㎞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 일행이 입국한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곳을 ‘강경 황산 나루 인근’ 또는 ‘황산포 화산 나바위 인근’으로 추정해 왔다. 최근에는 이 의견들을 수렴해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44쪽에는 이곳을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 도착”으로, 수원교구가 펴낸 역사총서 3권 「페레올 주교 서한」 343쪽 주 184에도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강경 황산포 근처의 나바위(현재 전북 익산시 망상면 화산리)였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한편, 김대건 신부 일행이 강경 도착 후 라파엘호에 관한 언급은 더는 없다. 아마도 발각되지 않기 위해 배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혔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후 강경 신자 집에 머문다. 하선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은진에 사는 신자 2명이 라파엘호에 몰래 접근했다. 그들은 피부색이 다른 선교사들을 위장시키기 위해 상복과 방갓, 미투리 등을 준비해 왔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두 사람의 등에 업혀 순교자들의 땅에 내렸다.

 

“우리는 야음을 틈타서 앞장서서 가는 신자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은 흙으로 지어진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방이 두 칸 있었고, 높이가 약 3피에(약 96㎝)인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창문 역할도 합니다.…너그러운 그 집 주인은 우리에게 숙소를 내주려고 사람을 시켜서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페레올 주교의 앞의 편지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3월 1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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