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3-25.....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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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3-24 ㅣ No.2018

 

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2016. 3. 25. 이태원

주제 : 끊임없는 힘겨움을 극복하기

사람은 자신의 삶이 힘겨울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삶에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과정이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자기 목숨을 자기의지에 따라 쉽게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판단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삶의 힘겨움을 상대로 하여 당찬 마음과 생각으로 반발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방법이 좋은 것이고, 어떤 방법이 권장할 만한 것이고 그대로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기는 쉬워도. 다른 사람이 실제의 삶에서 그렇게 살도록 강요할 방법은 없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말 그대로 자유와 자율권이 충분히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다는 이러한 자유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 사람이 바랄 대답이라면, 당연히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삶을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얼마나 멀리 할 수 있는지 알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 성금요일일입니다.

목요일 밤,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게쎄마니동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으로 유다는 성전의 경비병들과 함께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다가온 고통은 그날 밤을 넘기고, 다음날인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형이 떨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고, 3시간쯤을 십자가에 달려계시다가 세상의 목숨을 마치시는 것을 대하면서, 오늘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평소에 읽는 것보다는 길게, 평소에는 읽지 않는 아주 긴 내용을 우리는 조금 전에 요한이 전하는 수난기로 함께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난기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이해하는 시간이었을까요? 아니면, 기적으로써 충분히 그 역경과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는 분이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그저 무기력하게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도 힘겹고 어려운 것이라면 무슨 힘으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시간이었을까요?

 

삶에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이 자신감은 자신이 잘하는 일이거나 미리부터 준비하고 예상했던 대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계획대로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에 대하여 피하거나 숨지 않고 의연하게 맞대응한 분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모양을 드러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소리를 내지는 않더라도 대답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 그대로 내가 갖고 있다고 말할 삶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쎄마니동산에서 성전경비병들을 만났을 때도, 빌라도가 죄를 캐내려고 묻거나 심문하는 소리에도 예수님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자세로 대응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놀라운 자세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과 어려움의 한계를 훤히 꿰는 분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실 수도 있지만, 실제로도 그러하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통을 이겨내신 것을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대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삶에서 고통은 정해진 대로, 우리가 예상한 그대로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게 직접 고통과 힘겨움을 겪으면서 이기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생각하는 차이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삶을 마치신 분(요한19,7)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분을 죽여야 하겠다고 외쳤던 유대인들은 빌라도총독의 앞에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 말대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언한 것일까요? 빌라도가 한 일을 생각하고 그가 처한 곤경을 이해(!)해준다면, 그는 강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일을 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기의 삶을 능동적으로 대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신 순간에도 세상에 남은 어머니와 제자를 걱정하십니다. 그러한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라면,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삶에 다가오는 힘겨운 것들은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피하겠다고 해서 그 고통과 힘겨운 것들이 내 삶을 피해서 멀리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게 다가오는 그것들을 정면으로 부딪혀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볼 때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막을 내리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과 힘겨움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일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힘겨운 일에도 굳건하게 부딪혔던 예수님, 저희에게도 삶의 끈기와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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