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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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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3-30 ㅣ No.390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구티에레스에 따르면 해방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를 통해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구체화되는 이 해방의 영성이 하느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의한 상황이 빚어낸 실제 가난에 처한 이들이다.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유하면서도 가난해지셨고, 일생 동안 가난하게 사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가난이 최고 형태로 표현된 십자가 죽음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 사실을 입증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빠져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도덕적 혹은 영신적 상태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210).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의 무상성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길로 제시된다.

하느님 중심의 관점과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핵심 표징이라는 점에서 교회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데인 문헌」, 제14장 교회의 가난 참조)와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푸에블라 문헌」, 1134-1165항 참조)에서도 강조되고 있으며, 이 정신은 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사회적 관심」(1987, 42항, 46항 참조)과 「백주년」(1991, 11항 참조)에서부터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2013, 198-199항 참조)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보편적 사명의 차원에서 일관되게 수용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배타성과 무관하며, 복음의 보편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보편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한 출발점이다. 인간 존엄성을 심대하게 훼손하는 반복음적 가난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깊은 균열이 나 있다는 표시이기에 하느님의 나라와 양립할 수 없으며, 죄의 표징으로서 가난이 빚어내는 균열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때 참으로 모두가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표방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회칙 등 문헌에 교회의 보편적 사명 차원에서 일관되게 수용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ㆍ「백주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구티에레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이 '교회의 진정한 복음적 증거'라고 강조하면서(「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 241 참조) 동시에 교회가 가난을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진정성을 입증해주는 척도요 "교회 사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표징"이라고 말한다(「해방신학」 337). 따라서 교회는 기존 질서와 연루돼 있음으로 해서,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악에 대해 침묵을 지킴으로써 불의를 조장하지는 않았는지, 교회의 부동산, 주택과 부속건물, 생활양식 전체를 통해 오히려 가난한 교회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지 겸허하게 고백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해방신학」 125, 143). 교회가 가난을 증언하는 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 선포, 부정과 불의에 대한 규탄, 검소한 생활, 봉사정신, 세속 권력과의 야합ㆍ특혜의 포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있다.


해방신학을 둘러싼 갈등과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입장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반공주의 내지는 국가안보주의를 내세운 미국을 비롯해 남미의 정치세력과 경제적 권력집단은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해방신학 반대세력으로부터 조직적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고 1984년부터 이른바 해방신학을 둘러싼 갈등은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특히 마르크시즘 분석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의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시대 안에서 교회의 구조와 직무 수행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 죄와 해방 그리고 구원의 관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정치적 귀결, 정통신학에 대한 이해 등과 같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쟁점에서부터 신학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갈등이 표출됐다.

이와 관련, 특히 당시 라칭거 추기경이 장관으로 있던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1984)과 그 후속 문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1986)을 잇달아 발표했다. 특히 1984년 훈령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여러 경향으로부터 빌어온 개념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부 해방신학의 형태에 의하여 초래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을 손상시키는 일탈 또는 일탈의 위험"(서론)을 경고했다. 물론 1984년 훈령에는 해방신학자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특히 그의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1979)과 같은 저술)의 관점도 경고 대상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구티에레스는 마르크시즘의 분석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고, 결코 계급투쟁을 통한 해방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사실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비판하는 마르크시즘과 해방신학의 연루문제는 이론적 논쟁의 차원보다는 기득권 체제의 균열을 방어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공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설령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반공주의 및 지배 세력의 논리에 호응하는 것으로 귀결됐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 천주교회 입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명서, 1984). 이 성명서는 엄밀한 성찰을 거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1984년 훈령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에 대한 오독 내지는 무지가 아니면 표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의 의의와 오늘의 의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서 출발해 그들의 시선으로 신학을 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었다는 점은 언제나 유효한 것으로 남아 모든 신학적 행위를 성찰하도록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무엇보다도 불의한 상황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에 현존하시고 그들을 향해 무상성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깊은 천착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무상성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실천적 관상 없이 우리는 결코 그의 신학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의 신학의 문턱 앞에서 좌초한 이유는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아무튼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교회의 사명실천의 중심으로 새롭게 수용하게 된 것은 해방신학이 선사한 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구티에레스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점은, 이른바 복음의 육화 내지 토착화라는 과제와 관련해 부차적이 아니라 본질적임을 재차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신학의 관점은 교회의 신학 역사에서 언제나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선포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해방신학이 서구의 신학, 특히 정치신학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민중신학 및 사회변혁운동에 큰 영향과 자극을 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하느님 나라의 전망 안에서 해방실천을 신학적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이론과 실천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명만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해방과 구원에 투신한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겸허한 헌화와 같은 것이며, 모든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가 돼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를 회복하도록 하는 초대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해방실천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그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오늘날 변화된 인간상황과 세계상황 속에서도 해방신학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냐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 끝까지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계속될 것이라고.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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