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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장순도 신부의 한센인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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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4-11 ㅣ No.627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여지거라” - 장순도(1903~1971) 신부의 한센인 사목

 

 

우리 사회에는 한때 나환자, 즉 한센병 환자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거두어 주지도 않는 병자들이었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했고 사회도 방치했다. 당시 이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불림을 받은 사제가 있다. 주께서는 너무나 천대받던 한센병 환자들의 영혼을 보살피라고 젊고 똑똑한 한 ‘신부’를 부르셨다. 그는 사제서품을 받은 다음 한센병 환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한센병 환자 병원에서 자신의 치료를 겸하면서 28년간 사목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음성환자로 귀국해서 10년간 자신이 소속된 대구대교구 관내 뿐만 아니라 고국땅 환자들을 위해 사목했다. 그는 “아쉬운 것 없이 받은 것에 감사한다.”고 말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장순도 바르나바였다.


하느님, 장순도 신부를 부르시다

장순도 신부는 경상남도 문산의 구교우 집안에서 8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본당 회장을 역임한 신앙심 깊고 덕목을 갖춘 분이었다. 그는 15세 되던 1917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했다. 12년의 교과과정을 거쳐 성유스티노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29년 사제가 되었다. 그는 약간 곱슬머리에 음악을 잘 하는, 잘 생기고 인기있는 신부였다. 사제서품 직후 그는 계산성당 보좌신부로 발령났다.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그는 남방천주교회청년회의 지도신부로서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 부사장 직책을 맡았다. 드망즈 주교는 대구의 청년신자들이 간행하기 시작했던 천주교회보를 교구기관지로 승격시키면서 페셀 신부와 장순도 신부에게 이 일을 주관하게 했다.

서품을 받은 지 3년 후인 1932년 장 신부는 신설된 합천본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1934년 초부터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함양공소를 사목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뒤꿈치가 하얗게 벗겨졌는데 통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한센병으로 진단이 났다. 드망즈 주교는 그해 방인사제피정 마지막 날 그 합천본당에 주임신부를 새로 발령했다. 당시 ‘나환자’는 소록도에 격리 수용되던 때였다. 그러나 주교는 소록도로 일단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데, 신부를 어떻게 소록도로 보내느냐며 외국에 가서 치료하고 오라고 했다. 주교는 장 신부를 일본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대목구에서 마리아의 선교자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경영하던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인 ‘대로원(待勞院)’에 지도신부로 보내기로 했다.

출발 하루 전날 드망즈 주교는 삼덕동 일본인 성당 사제실에서 장 신부에게 강복을 하고 서찰을 주었다. 일본인 회장을 시켜 신부를 일본까지 동행케 했다. 그리고 주교는 이때 신학생을 선발하기 전에 입학 결격사유가 될 만한 가족 유전병이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공문을 내려야 했다. 당시에는 한센병을 유전병의 일종으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장순도 신부는 28년간 대로원 병원에서 환자를 사목하며 자신도 치료를 받았다. 그는 증상이 심해서 고생이 많았다. 그곳에서 대동아전쟁 기간도 지냈다. 미군의 폭격이 바로 그의 근처에 떨어져 늘 차고 다니던 돈주머니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일본 패전 이후에는 한일관계가 단절되면서 고국소식을 듣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일본에 있는 동안 본국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묵주기도를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그 세월동안 대구교구는 주교도 다섯 분이나 바뀌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50년대 들어서서 본격적인 한센병 환자 진료가 시작되었다. 메리놀회의 캐롤 주교가 성나자로마을을 세웠고, 스위니 신부가 들어와 이동진료를 시작했다. 대구교구 관내에도 왜관성베네딕도수도원,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예수성심시녀회, 프란치스코회들이 한센병 환우 진료를 펴고 있었다. 이때 서정길 대주교는 교구청에 근무하던 루디 신부에게 교구 구라(救癩)사업을 맡겼다. 루디 신부는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경북 의성에 ‘신락원’, 고령에 ‘은양원’을 세워 나환자들의 자활을 지원하며 치료해 주었다. 1961년 루디 신부를 통해서 오스트리아에서 간호사 엠마 프라이징거가 입국했다. 엠마는 ‘은양원’에 기거하며 경북대 의대 병원의 진료지원을 받아 대명동에 간호센터를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봉덕동에 한센병 환자 자녀들을 위한 아동기숙사를 마련하고 그들의 취학을 도왔다. 1963년에는 대구시 북구 읍내동에 오스트리아의 원조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다. 루디 신부가 원장이었다.

이렇게 한센병 환자 진료를 거의 외국돈, 외국인에 의존하고 있을 때 서정길 대주교는 일본에 있던 장순도 신부를 교구 관내의 한센병 환자 사목을 위해 교구로 돌아오도록 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대구교구 한센병 환우사목 담당신부로 임명받았다. 그는 교구에서 한센병 환우사목을 전담하는 첫 한국인 사제가 되었다.


아픈 이는 예수마음을 담고 아픈 이를 본다

1962년 1월 장순도 신부는 서대주교로부터 귀국에 필요한 서류들과 귀국방법을 자세히 적은 편지를 받았다. 대주교는 항공권과 비용을 인선하겠다면서 검역소를 통과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써서 보냈다. 만일 공항의 검역소를 통과하지 못하면 선편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때는 여객선이 아닌 무역선으로 귀국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장 신부에게는 느닷없는, 그러나 갈망하던 편지였다. 장 신부는 국내에 있던 지인에게 집단수용소(은양원)가 어떤 곳인지, 일반인들 사이에 있는 마을인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 집과 병자들이 생활하는 부락전경을 사진 찍어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매일 약을 먹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데, 귀국해서도 치료가 가능한지를 궁금해 했다.

한일간에 국교가 열리지 않고 있는 때, 더구나 공항의 검역소를 통과해야 하는 귀국수속은 복잡했다. 그래도 그는 검역소의 검사를 통과했고, 주일(駐日) 한국대표부에 가서 영주귀국허가증도 받았다. 그는 고국에서 임종을 맞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여겼지만 막상 떠나는 것을 알고 대로원의 수녀들, 환자들은 대단히 섭섭해 했다. 그는 이렇게 28년간의 대로원 사목을 마쳤다. 장 신부는 1962년 4월 14일 하카다마루호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12일이 모자라는 28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는 지인에게 마중을 부탁했다. 그는 변해버린 한국이 낯설기도 했고, 또 한센병에 관한 편견이 아직 만연하던 때 혼자 여행하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경북 은양원에는 주민 100여 명이 건물 15동에 나뉘어 살았고, 자활농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사목자로 파견된 장 신부는 정착하기가 힘들었다. 서양인 신부는 와서 미사드리고 구호물자도 주는데, 한국인 신부는 줄 게 없으니까 사람들은 서양인 신부가 계속 오기를 바랐다. 또 장 신부에게 은양원에서 나가라고도 했다. 그러나 결국 진심이 통해 장 신부는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듬해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이 생기고부터 장 신부는 병원에 일주일씩 머무르며 치료받았다. 그리고 의성 탑리 신락원 등 한센인 정착촌을 순회하며 사목했다. 장 신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국내 천주교 계통의 한센병 환자촌을 전부 방문했다. 소록도에서는 한 달간 머물렀다. 장 신부는 자신을 “나환자들의 사제”로 여기며 그 사명감으로 곳곳의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장 신부의 잦은 사목여행에 동행하며 시중드는 지팡이가 되어 준 이는 박 말가리다였다. 장 신부는 손과 발의 형태가 어그러졌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버스도 태워주지 않았다. 말가리다가 손을 들고 버스를 먼저 타고, 이어 신부가 타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 신부는 한센병 치료가 완치되어 음성환자인 상태였다. 그러나 무릎과 엉덩이 부근에 상처가 있어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았다. 집에서는 굳은 칼로 상처를 깎아 내곤 했다. 상처를 깎다가 잘못해서 피가 나도 아픈 줄 몰랐다. 그래서 말가리다는 여행을 할 때면 늘 비닐과 붕대를 들고 다녔다. 사람들은 장 신부가 앉았던 자리에는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는 머물 데가 마땅치 않아 말가리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말가리다는 모친께 새 이부자리를 최고급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부탁했다. 모친은 다우다(나일론)로 이불을 깔끔히 지어 놓았다. 그런데 당시 노안본당 사제는 외국인이었는데, “사제가 왜 일반인의 집에서 주무시냐?”며 사제관으로 오라고 하고는 자신의 침대를 내어주었다. 말가리다는 그 침대에 고름이 묻을까봐 열심히 비닐을 깔고 상처를 붕대로 싸매드리면서 삼일을 지냈다. 말가리다는 지금도 외국인 신부여서 그 일이 가능했으리라고 기억할 정도로 당시는 척박한 때였다. 말가리다는 전남 무안에서 가톨릭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어 했다. 스무 살 때 본당신부의 주선으로 대구 효성여대 간호원 기숙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은양원에 있는 간호원들 집의 일을 돕기 위해 한 달 동안 가 있게 되었다. 이때 장 신부가 도착했다. 신부는 그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무서워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단다.

그러던 중 말가리다는 장 신부가 외국인 신부나 간호원들과는 달리 너무 추워하는 것을 보았다. 한복을 한 벌 지어 드리고 싶었다. 포플린과 솜을 사달라고 해서 옷을 지었다. 그 옷을 입고 장 신부는 혈색이 돌아오면서 “따시다, 따시다!”를 연발했다. 말가리다는 결국 신부의 식복사로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처음 시작과는 달리 진정으로 장 신부의 손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25~26세 처녀의 몸으로 천형병이라는 잘못된 편견으로 모두가 기피하던 한센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장 신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한 그를 기억했다. 그는 여러 다른 환자들에게도 격의 없는 벗이 되어 환자들은 말가리다에게 깊은 속사정까지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말가리다는 성격이 밝은 사람이었다. 신부 회갑잔칫날, 신부가 보릿대를 쌓아 놓은 곳에서 쓰레기를 태우다 화재를 냈다. 그는 “신부님, 회갑땜 하셨으니 오래 사실 것”이라고 했다. 대구의 할머니들도 자신을 많이 귀여워했음을 기억한다.

장순도 신부는 1971년 들꽃마을에서 선종했으며, 남산동 성직자묘지에 안치되었다. 교구에서는 공문으로 장순도 신부의 선종을 알리며 교구 사제들에게 고인을 위해 미사 세 대씩 바치기를 명했다. 28년간 일본 한센병 환자의 병원사목, 10년의 한국 환자 사목을 감당해 낸 삶이었다. 장 신부의 식복사 말가리다는 신부가 선종한 지 13년 후 장 신부를 모셨던 공로로 다미안신부상 봉사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장 신부 본인 병을 위한 사목활동은 덮여 있다. 한센병 환자였던 장 신부는 또 다른 한센병 환자들의 벗이 되었다. 한 번의 사제는 영원한 사제다. 그는 영원한 사제요 환자의 벗으로 살다가 그 신고에 찬 삶을 마감했다. 그가 사목한 내용을 정확히 알면 바로 대구대교구의 한센인 사목활동이 이루어진 현장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구사의 파악을 통해 모든 한센인의 아픔을 위로하고, 장 신부의 고통과 사제직의 기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장순도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시고 있었다. 신부가 세상을 뜬 다음 그 유해는 엠마 원장에 의해 관덕정에 모셔졌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성모당에서 장순도 신부를 위해 기도하는 분을 만났다고도 한다. 장 신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목활동을 한국교회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해 주는 일은 시간의 정의이며 역사의 정의일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원하여 깨끗해진 사제였다.(도움 : 엠마 프라이징거, 장요한, 박말가리다, 교구사료실)

 

[월간빛, 2014년 4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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