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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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교구: 땅 끝자락에서 불던 혁신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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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400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기사] 땅 끝자락에서 불던 혁신의 바람

 

 

때론 한 장의 사진이 많은 말을 하기도 한다. 사진 속에는 분명 흘러가는 시간의 한 순간만이 포착되지만, 그 사진 한 장 속에는 시대 전체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다. 굳이 시시콜콜하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시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사진이 하는 말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여기에 연길 수도원에서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주 쉽다. 미사를 드리고 있다. 주례자의 모습이 희미하다. 그러나 옆에 주교 지팡이가 있는 것을 보니 주례자는 수도원장이며 연길 대목구장인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이다. 그런데 보통미사가 아니다. 제대 앞에도 뒤에도 복사들이 잔뜩 도열해 있다. 신자석 오른쪽에는 해성학교라고 쓰인 깃발을 든 사내아이들이 서 있고, 그 왼쪽에는 꽃단장을 한 계집애들이 서 있다. 만일 이쯤에서 ‘연길 수도원 성당에서 드리는 대축일 미사겠지’라고 지레 짐작한다면 당신은 사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이 사진은 아주 흥미로운 역사자료이다. 왜냐하면 땅 끝 북간도에서 불었던 혁신의 바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나오는 미사 장면은 지금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미사가 지금처럼 거행된 지는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나고 전례개혁이 일어나 자국어 미사가 허용되기 전(1969년)까지 가톨릭교회(라틴예법 소속)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라틴어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이 미사는 주례사제가 내내 제대를 바라보고 라틴어로 거행하였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은 다만 구경꾼에 불과했고, 미사는 하느님과 만나는 즐거운 축제의 장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신령한 약인 성체를 모시는 일종의 신심행위로 전락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사제가 신자를 보며 미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아주 혁신적인 일이었다.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의 전기인 『승리의 십자가』를 보면 ‘신자들을 향한’versus Populum 미사가 그의 사제서품 은경축(1940년)에 처음 거행되었다고 나온다. 이런 혁신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떻게 아시아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교구에서 이런 획기적인 시도를 했던 것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전례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은 전부터 이미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전례운동이라고 불렀다. 전례운동은 19세기 중반 베네딕도회가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솔렘Solesmes 수도원과 독일의 보이론Beuron 수도원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그레고리오 성가가 새롭게 꽃을 피웠고 신자들을 위한 미사 책들이 출판되었다. 1903년 11월 22일 교황 비오 10세의 자의교서 『목자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Tra le sollecitudini를 통해 전례운동이 교도권 차원에서 인정받았다.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능동적 참여’participatio actuosa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말은 신자들이 교회의 전례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도 쓰이게 된다. 전례운동은 벨기에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람베르 보뒤앵(Lambert Beauduin, 1873-1960)이 1909년 9월 23일 벨기에 가톨릭 모임에서 연설을 한 이후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널리 퍼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이 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이 운동은 특히 독일어권 지역에서 활발했다.

 

1913년 일데폰스 헤르베겐스Ildefons Herwegens가 독일 마리아 라흐Maria Laach 수도원의 아빠스로 뽑히자 독일 내 전례운동은 역사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분위기 속에서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오도 카젤Odo Casel, 요한네스 핀스크Johannes Pinsk가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과르디니는 자신이 1918년에 출판한 『전례정신으로부터』Vom Geist der Liturgie라는 책을 통해 전례운동의 계획을 요약 정리하였다. 그의 중점 사항은 ‘신앙의 중심에서 밖으로 나와 세상을 향해 관심갖기’였으며, 인간의 참된 품위는 전례 거행 안에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두었다. 예를 들어 미사 집전 중에 사제가 라틴어로 바치는 기도문들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자국어로 바치는 부분들도 전례운동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부활성야 거행과 제대를 신자들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 또한 강조하였다. 전례운동의 이상은 가톨릭 청년연맹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면서 독일 성직자들 사이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널리 퍼졌다. 아우구스티노회 참사회원인 피우스 파르쉬Pius Parsch가 1922년부터 독일의 노이부륵Neuburg 수도원에서 그 이상을 실천했으며,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이를 널리 알렸다.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룩Innsbruck에서는 예수회 신부로서 전례 학자인 요셉 안드레아스 융만Josef Andreas Jungmann이 전례쇄신과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요한네스 핀스크가 자비로 출판한 잡지 『전례저널』Liturgische Zeitschrif(1928-1933)과 『전례생활』Liturgisches Leben(1934-1939) 이 전례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전례운동은 얼마 뒤 곧 비판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전례 규정들이 무시되면서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비판,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었다. 1939년 막스 카씨에페Max Kassiepe는 『현대 신심생활의 잘못된 방향 및 빗나간 길』Irrwege und Umwege im Frommigkeitsleben der Gegenwart을 출판하여, 전례운동의 목표를 매섭게 공격하였다. 우리가 전례의 세세한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면 신앙생활의 쇄신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의 수사였던 그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그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토의를 거듭하면서 전례운동은 주교회의 산하 전례위원회의 노력과 1943년 6월 29일자 사도적 서한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의 도움으로 다소 균형을 찾게 되었다. 1947년 11월 20일자 사도적 서한 『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는 전례운동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응답이었다. 전례운동의 몇몇 잘못들이 부드러운 어조로 지적되긴 했어도, 다른 한편으로 몇몇 내용과 형식들은 추인을 받았다. 하지만 전례운동의 일관된 요청은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나고 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 및 이후 단행된 1969년의 전례 개혁에서 받아들여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의 기조를 이루었던 전례운동은 연길 수도원이 북간도에서 선교활동을 펴던 1920-194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례운동의 정신은 오딜리아 연합회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유럽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만주까지 전파되었다. 독일과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연길 수도원 소속 신부들은 그때 한창 유럽에서 불붙고 있었던 전례운동의 이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물론 전례운동이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활성화되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그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는 전례운동이 연길 교구에 전파되도록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전례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연길 교구부감목(총대리)이었던 콘라드 랍(Konrad Rapp, 朴敎範, 1896-1932) 신부와 가톨릭 소년사 사장이었던 발두인 아펠만(Balduin Appelmann, 裵光被, 1902-1975) 신부였다. 두 신부는 우선 청소년들에게 전례운동의 정신을 심어나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임으로 있었던 대령동과 용정 본당에서 복사단을 주축으로 하여 타르치시오회라는 청소년 단체를 만들었다. 타르치시오회는 신심단체의 성격을 띠었고, 한편으로 회원들은 전례교육을 받고, 본당 신부를 도와 전례거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중요한 축일에 저녁기도를 노래하였으며 사순절, 대림절 같은 때에는 모든 전례를 장엄하게 거행함으로써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31년 8월 3일에 대령동 본당에서 개최된 제1차 전全간도 가톨릭 소년 연합대회를 계기로 타르치시오회는 청소년 협회란 명칭으로 전 교구로 펴져나갔고, 1934년에는 이미 회원이 300명을 넘어섰다. 처녀들로 결성된 데레사 소녀회와 중등학교 여학생들이 모인 세실리아 소녀회 역시 전례운동 전파의 협력자들이었다.

 

콘라드 랍 신부는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전례정신을 함양시키는 한편 틈틈이 주일미사와 축일 미사 경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1931년 『미사 규식』이라는 제목으로 엮어 등사판으로 찍어 각 본당에 보급하였다. 이어서 발두인 아펠만 신부가 우리말로 번역한 『소미사경본』이 나왔다. 콘라드 신부가 쓴 『미사 규식』은 1933년에 덕원신학교 활판부에서 인쇄되었는데, 『미사성제』라는 덕원 수도원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1890-1949) 신부가 번역한 미사해설이 내용에 첨가되었다. 이런 전례서들은 신자들에게 미사의 올바른 의미를 알려주었다. 사제들이 하는 라틴어 기도의 뜻은 물론 신자들이 쉽게 응답할 수 있도록 라틴어에 한글로 토를 달아 놓았다. 또한 사제들의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사의 각 부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혹은 어떤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여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차근차근 전례운동의 정신을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1940년 7월16일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의 사제서품25주년을 기념하면서 전례정신에 입각한 미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는 신자들을 향하여 미사를 드렸으며, 이 미사 중에는 처음으로 예물봉헌이 신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구경꾼에 불과했던 신자들이 주례사제와 함께 미사를 거행하는 순간이었다.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면서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10여 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순간이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어 한 갑자甲子가 훨씬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분도, 2008년 가을호, 글 편집부,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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