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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5: 황여전람도와 조선왕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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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30 ㅣ No.435

[창간 84주년 기획 - 지도로 보는 교회 이야기] (5 · 끝) 황여전람도와 조선왕국도


조선에 천주교 신앙 싹트는 계기 마련

 

 

16∼17세기 천주교 전교를 위해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지도와 그들이 전한 지도제작술은 동서 문화의 교류 차원에서 그 뜻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마태오 리치 신부의 곤여만국전도로부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측량하고 제작한 황여전람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든 지도가 유럽에 전해지고 그것이 다시 유럽의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지도첩으로 출간되면서 은둔의 나라 조선왕국이 서양에 알려지게 됐으며, 조선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선진문화의 영향으로 실학이 발전하고 천주교 신앙이 싹트는 계기가 됐다.

 

 

조선 포함된 황여전람도

 

- 1737년 당빌이 황여전람도를 기초로 제작한 ‘신중국지도첩’에 실린 중국 · 달단 · 티베트 지도.

 

 

청나라 강희제 때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중국 전역을 나타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에는 의외로 조선과 대마도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조선은 숙종 때로 인조 14년(1638년)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국의 강압으로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주눅 들어 지내던 시기였다. 청나라 쪽에서 본다면 국토 전역의 지도를 제작하면서 신하의 나라로 여겼던 조선을 포함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황여전람도를 측량할 당시 동북지방의 측량 책임자였던 레지 신부 일행이 요동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조선과의 변경 지역에까지 이르렀을 때 선교사들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북경을 출발할 때 강희제의 명으로 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청나라는 1711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변경 지역을 조사케 하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과의 국경 획정을 위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한편 조선 조정에 대놓고 지도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는 조선을 직접 측량할 수 없게 되자 조선의 지도를 받아 황여전람도에 편집해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713년 청나라의 천문대 사력(司曆)인 하국주(何國柱)가 조선에 들어와 한양의 위도(緯度)를 측정했고, 숙종실록에 나와 있듯 조정의 중신들이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전 어떤 지도를 내어줄 것인가를 논의한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는 동국지도(東國地圖)와 같은 아주 상세한 전국 지도가 있었지만 청나라의 속내를 알지 못한 조선 조정으로서는 머리를 맞댄 끝에 상세하지도 않고 간략하지도 않은 이른바 불상불략(不詳不略)한 지도를 내주었다. 청나라 사신이 가져간 이 지도는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성의 위도 값과 방안좌표로 위치를 잡아 황여전람도에 붙게 된 것이다.

 

 

유럽에 전해진 황여전람도

 

1749년 당빌이 제작한 조선과 일본 지도의 일부.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이 확실히 구분돼 보인다.

 

 

황여전람도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조·청 변경지역을 측량했던 레지 신부가 「조선의 지리」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프랑스 예수회로 보낼 때, 북경 주재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황여전람도의 기본 도면도 함께 보내졌다고 한다. 프랑스로 보내진 지도는 뒤 알드(J. B. Du Halde) 신부에 의해 국왕 루이 15세에게 바쳐졌고, 왕립도서관에 보관됐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수석 지리학자이며 지도제작자였던 당빌(J. B. B. D'Anville)은 이 황여전람도를 저본으로 1720년경부터 조선왕국도를 비롯해 1729년 중국전도, 1723년 중국령 달단지도, 1733년 티베트 전도, 1734년 중국·달단·티베트 지도 등 동아시아에 관한 여러 종류의 지도를 제작하게 되었다.

 

한편 뒤 알드 신부는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정리·편집해 「중국제국전지(中國帝國全誌, Description de la Chine)」라고 하는 네 권의 방대한 저서를 1735년 파리에서 출판했는데, 이 책에 당빌이 제작한 지도 43매가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조선왕국도(Royaume de Coree)가 독립적으로 소개되었다. 책 내용 중에는 황여전람도에 관한 사정과 레지 신부가 쓴 조선의 지리와 역사도 실려 있다.

 

당빌은 황여전람도 기본 도면을 다시 편집하여 「신중국지도첩(Nouvel Atlas de la Chine)」이라는 지도책을 173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판해 황여전람도를 유럽에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 지도책 서문에 조선왕국도는 조선의 지리학자가 제작한 것이며 조선 궁내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황여전람도에 조선지도가 들어가게 된 경위를 우회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국도의 수수께끼

 

1737년 당빌이 제작한 조선왕국도는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제작돼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근래 이러한 조선왕국도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 지도는 조·청 국경이 만주 쪽으로 더 치우쳐져 간도와 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또는 “청나라도 간도 지역을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는 식으로 이 지도가 마치 조·청 국경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처럼 발표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조선왕국도는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 훨씬 올라간 곳에 그려져 있고, 심지어 색깔로 구분되어 있어 누가 보아도 조선과 청나라의 영역을 구분해 놓은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황여전람도 영인본의 조선지도와 1735년까지 당빌이 제작한 조선왕국도에는 조·청간의 국경선이 보이지 않으나, 1737년 당빌이 펴낸 「신중국지도첩」 이후부터는 조선의 행정계와 더불어 조·청간의 국경선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1735년 뒤 알드 신부가 펴낸 ‘중국제국전지’ 내부 표지.

 

 

1712년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청나라 사신 목극등과 조선의 접반사 박권(朴權)이 만나 백두산 정상 남동쪽 4km 지점에 세운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을 보면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며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워 명기한다”라는 내용을 보더라도 당시 청나라가 조선왕국도에 보는 바와 같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위에 국경을 그려 넣었을 리 만무다.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는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때부터 청국의 발상지인 만주 일대를 신성시하는 차원에서 한족(漢族) 등 이민족의 이주를 금지하기 위한 봉금지대로 삼고, 그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든 유조변(柳條邊)을 설치했다. 이 유조변이 지도에 표시되면서 중국 사정에 어두웠던 유럽의 지도제작들에 의해 국경으로 잘못 표시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당빌이 제작한 조선왕국도에는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인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표기돼 있어 서양에서 출간된 우리나라 지도 가운데 독도가 표시된 최초의 지도로 영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 조정에서 내어준 지도를 중국이 그대로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그동안 좋은 글 기고해 주신 최선웅 대표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1일, 최선웅(안드레아 · 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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