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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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새 번역 교본 읽기: 회합과 단원(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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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04 ㅣ No.785

[새 번역 교본 읽기] 회합과 단원(제19장)

 

 

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검토해,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굵은 서체로 표시된 부분이 달리 번역된 부분입니다.)

 

 

제19장 회합과 단원


1. 회합을 존중하자

 

자연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힘의 전달은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느냐 아니면 끊어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지오 조직에서도 한 지점에서 치명적인 단절이 있을 수 있다. 레지오 단원이 회합에는 참석하지만, 앞서 레지오 생활에 관하여 묘사한 바 있는 그러한 영감과 헌신과 힘을 조금 밖에 전달받지 못하거나 전혀 전달받지 못할 수가 있다. 회합과 단원 사이에는 일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치는 단원이 순전히 기계적으로 회합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회합에 참석하는 일이 회합과 단원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회합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회합을 존중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는 순명, 충성, 존경으로 드러나며, 레지오 조직의 모든 것이 바로 이처럼 회합을 존중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2. 쁘레시디움은 존경받도록 힘써야 한다

 

어떤 쁘레시디움의 수준이 소속 단원들의 평균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이는 단원들을 이끌어야 할 안내자로서 첫 번째 본질적인 요소가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쁘레시디움에 대한 단원들의 존경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3. 쁘레시디움은 규율을 지켜야 한다

 

레지오 단원이 쁘레시디움을 존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만큼 그 단원은 레지오의 생명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레지오 정신의 핵심은 최고의 수준에 오르려는 노력에 있으므로, 쁘레시디움 자체가 단원들에게서 최고의 존경을 받도록 하여, 이를 통해 다시 단원들을 감화시켜야 한다. 만일 쁘레시디움이 레지오의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단원들에게만 규율을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회합 순서나 전반적인 회의 진행 절차를 규정대로 엄격히 따를 것을 교본의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중략)

 

11. 바른 질서는 규율의 뿌리이다

 

레지오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단원들 안에 규율을 지키는 정신을 기른다.

 

(가) 회합의 차림은 규정에 따라야 한다.

(나) 하나하나의 임무를 질서 있게 이어나가도록 한다.

(다) 규정에 따라 안건을 정확히 처리한다.

(라) 질서의 원천이신 성모님의 정신이 스며들게 한다.

 

이러한 규율의 정신이 없으면, 회합은 마치 머리는 명석하나 몸은 마비된 것처럼 단원들을 제지할 힘도 없고 밀고 나갈 힘도 없어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들을 양성할 수 없게 된다. 규율이 없다면 단원들은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정한 활동을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혼자서 수행하려는, 즉 될 수 있는 대로 통제를 적게 받으며 수행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성향에 휘둘리게 될 것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행한 활동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종교적인 목적에 바쳐진 규율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발생한다. 만일 그러한 규율이 확고하게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무자비하지 않고 교회 권위에 진정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규율이라면, 어느 누구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규율임이 증명될 것이다.

 

레지오는 규율의 정신을 특징으로 삼고 있고, 바로 이 점에서 일종의 보화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레지오는 이 보화를 외부 세상에도 나누어줄 능력도 있다. 오늘날 세상은 무익하게도 억압과 자유방임의 두 극단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있다. 이렇게 어지러운 현대 세계에서 레지오가 제공하는 규율의 정신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화가 아니겠는가.

 

내적 규율이 없는 곳에서는 전통이나 강압이 만들어낸 강력한 외적 규율이 작동함으로써 내적 규율의 결핍을 감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나 단체가 외적 규율에만 의존하고 있다가 위기가 닥쳐와 그 규율이 무너지면 개인도 단체도 곧 함께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 규율이 그 어떤 외적 규율 체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적 규율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규율이 적절한 비율로 결합되고 거기에 신앙이라는 감미로운 동기가 한데 얽히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세 겹으로 꼬인 줄”(코헬 4,12)을 갖게 된다.(중략)

 

14. 기도는 회합과 한 덩이가 되어야 한다

 

회합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체 앞에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친 다음, 각 쁘레시디움 회합실로 가도록 하자는 제안이 이따금씩 있었다. 회합의 일체성(一體性)은 레지오 조직 전체에 본질적인 것이다. 이 대원칙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회합이 일체를 이루어야만 회합에서 다루는 모든 것이 각각 기도의 특성을 지니게 되며, 이 기도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영웅적인 활동과 노력들이 훌륭한 결실을 맺는다. 만일 기도를 주회합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바친다면, 레지오 회합은 이 기도의 특성을 상실하게 된다. 기도를 다른 곳에서 바치도록 허용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회합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꿔 놓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회합을 바탕으로 세워진 레지오 조직의 특성 그 자체를 변질시킬 것이다. 사실 이처럼 변질된 조직체는 제아무리 큰 성과를 올린다 하더라도 이미 레지오 마리애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를 토대로 할 때,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묵주기도를 비롯하여 기도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생략하는 일은 더더욱 허용될 수 없음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몸이 살아 있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레지오 회합에서의 묵주기도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요소이다.(중략)

 

17. 성실한 보고가 겸손에 어긋나는가

 

어떤 단원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선행을 스스로 내세우는 것은 겸손의 덕에 어긋나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알맹이 없는 보고를 합리화한다. 그런데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시인들은 이를 일컬어 ‘마귀가 선호하는 죄’라고 읊었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생각 속에서 겸손이 아닌 교만이 교묘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쁘레시디움의 세심한 지도를 벗어나려는 욕구가 암암리에 스며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정말로 참된 겸손이라면, 교만을 겸손이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내걸도록 단원들을 다그칠까?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지 않다. 만일 그러한 행위를 다른 단원들이 모방한다면 그 쁘레시디움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후략)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2월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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