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프랑스 생테티엔르로(1664년)

– 야외성전의 입구에 있는 생테티엔르로에서 발현한 성모상(좌) 성지 전경. 오른쪽 하단에 성지가 보인다. 성지는 오지에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우)

1) 시대적 배경

프랑스의 생테티엔르로에서 성모님이 발현한 시기(1664~1718년)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 때 강력한 절대 왕조를 구축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친정 통치 기간(1661년~1715년)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프랑스 루이 14세가 통치하였던 기간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한다면 성모님이 발현한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다. 루이 14세의 친정 초기에는 재무대신 콜베르의 활약으로 막대한 재정 수입을 만들어 전례 없는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였으나 1682년 베르사유궁전이 완성된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가 재정은 계속되는 전쟁과 낭트 칙령의 폐지, 흉작과 기근 등으로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국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여기에 루이 14세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지방에 있던 모든 귀족들을 베르사유궁전이나 그 인근에 거주하게 하면서 프랑스의 지방경제는 붕괴되었다. 지방의 도시와 마을에는 시간이 갈수록 거지들이 들끓었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국민들의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도적 떼들이 나타나 약탈 등 수많은 범죄 행위가 만연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당연히 신앙생활도 약해져 가톨릭 냉담자가 증가하였다.

이렇게 루이 14세의 후반 통치 기간 동안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장기간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피폐해져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했을 때 프랑스 남부의 작은 산골마을 생테티엔르로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 팽드뢰에서 발현한 성모님이 브누아트에게 로를 가리키고 계신다.(좌) 성지 바로 옆에 위치한 브누아트의 집.(우)

2) 성모님의 발현

1664년 17세의 양치기 소녀 브누아트 랑퀴렐은 본당신부의 강론을 들은 후 성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는데, 5월 초 어느 날 그 지역에서 크게 존경받던 3세기 순교자인 성 모리스가 주교의 복장을 하고 그녀에게 나타나 ‘생테티엔르로’의 푸르 계곡으로 가면 하느님의 어머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5월 16일 브누아트가 그녀의 양 떼를 데리고 계곡의 작은 동굴 앞에 가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성모님이 성자를 안고 나타나셨다. 브누아트가 “아름다운 여인이여,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고 말하자 성모님은 미소만 지으시고 잠시 서 계시다가 동굴 속으로 사라지셨다. 이후 약 4개월 동안 성모님은 매일 브누아트에게 발현하시어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며 미래의 사명을 준비하게 하셨다. 8월 29일에 브누아트가 여인에게 이름을 물어보자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 성모님이다”라고 밝히셨다.

한 달 후 9월 말 성모님은 계곡의 반대편에 있는 팽드뢰에 나타나시어 브누아트에게 “마을에서 떨어진 곳인 로(Laus)에 있는 예배당으로 가면 좋은 향기가 날 것이며, 이제 그곳에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브누아트는 성모님이 지시한 장소로 갔고 그곳에서 성모님께 봉헌된 작고 오래된 초가지붕의 예배당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예배당은 매우 낡아 있었지만 달콤한 향기가 나서 성모님이 지시하신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예배당으로 들어가자 성모님이 나타나셨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의 아들에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이 장소를 요청했고 그는 그것을 나에게 허락하였다. 이곳에 내 사랑하는 아들을 기념하여 세우는 새 성전은 수많은 죄인들을 위한 회개의 장소가 될 것이며 나는 자주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 로의 성모 대성당.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에 의해 건립된 성당이다.(좌) 로의 대성당 내부. 제단 중앙부에 발현하신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우)

브누아트는 성모님이 주신 사명대로 성당의 건립을 교회 당국에 전달하였고 성모님의 발현이 주변 지역으로 널리 알려지자 1665년 봄부터 18개월 동안 13만 명이 순례하였다. 생테티엔르로의 성모님은 1664년 5월 16일에 처음 브누아트에게 발현하신 이후 1718년 12월 브누아트가 선종할 때까지 54년간 무려 2,500번 이상을 발현하셨다. 이는 성모님이 동일한 지역에서 같은 시현자에게 가장 오랜 기간 발현하신 것으로 시현자에게 나타난 횟수도 가장 많았던 발현이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브누아트가 성모님의 발현을 교회 당국에 알리자 앙브렝 교구는 브누아트가 거짓말을 하며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들을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파견된 랑베르와 가이야르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은 절름발이로 6년 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던 캐서린 비알에게 일어난 치유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 “예배당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라고 선언하며 기적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성모님의 발현이 주변 지역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였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순례 온 사람까지도 합심하여 새로운 성당을 건립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의 가톨릭 신자들이 얼마나 위안과 행복을 갈구하였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성모님을 찾아가는 성지 순례를 통해 원하는 이상으로 충분한 위로와 축복을 받았음은 확실하다. 이런 이유로 ‘생테티엔르로’에서 발현한 성모님은 ‘죄인들의 피난처 성모님(Our Lady of Refuge of Sinners)’, 또는 ‘행복한 만남의 성모님(Our Lady of Happy Meetings)’으로 불린다.

- 2008년 5월 4일 야외 성전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는 미사가 봉헌되었다.

브누아트는 도미니코회 수도자들과 함께 순례자들을 안내하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그녀는 도미니코 회의 제3 회원이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제3 회원의 베일과 어깨 망토를 입으면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더욱 강해져 갔으며, 사람들은 ‘브누아트 수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브누아트가 몸이 아픈 방문자에게 성모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성지에 있는 램프의 특별한 성유를 사용하자 이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브누아트는 한때 교회에 의해 상당 기간 가택연금을 당하며 주일미사만 허용되는 힘든 과정을 거쳤으며, 성모님이 54년간 계속 자신에게 발현하시는 것을 감내하였다. 성모님의 발현을 한두 번 시현해도 그 충격과 부담이 엄청난데 무려 54년간 2,500번의 발현을 체험한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 교황님이 그녀를 칭송하였고 이러한 칭송은 지역 주교가 성모님의 발현을 공식적으로 공인하는 단초가 되었다.성모님의 첫 발현 후 344년이 지난 2008년 5월 4일 가프 교구장 장 미셀 디 팔코 주교는 성지의 야외 성전에서 여러 국가에서 온 30명의 추기경과 주교들을 모시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성모님 발현을 공식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이 기념 미사는 TV를 통하여 프랑스 전 지역에 중계되었다. 2009년 4월 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브누아트의 영웅적인 미덕을 칭송하면서 그녀를 가경자로 선포하였다. 생테티엔르로 성지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기에 가톨릭 철학자 장 기통은 “유럽에서 가장 멀리 숨어 있는 성지이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지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지명도가 있어 인근의 이탈리아에서도 수많은 순례자가 찾아왔는데 이런 이유로 ‘로’의 성지는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의 프랑스 루트에 포함되었다. 이탈리아의 수사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남부를 거친 후 아를로 가는 순례 루트에 생테티엔르로가 있는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7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 도곡동성당 인자하신 모후 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