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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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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2 ㅣ No.716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얼마 전 제주도를 순례하면서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16-1867년)의 현양비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하였고, 3월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습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중국 땅에서 조선인을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이곳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대축일인 5월 31일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에 가기에 앞서서, 페롱(S. Feron)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신부를 만났습니다. 이렇듯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1858년 10월 4일자 서한).

 

그는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에 돌아왔습니다. 죽었을 것으로 여겼던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가족과 고향 사람들에게 갖고 온 선물은 바로 천주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를 반기는 가족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교리를 가르쳤고, 1859년에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를 만났습니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인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는 1865년에 또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고, 귀국하여서는 리델(F. Ridel) 신부를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습니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습니다. 그는 여비를 마련하려고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는,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가 1867년 1월이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천주교 묘역에 순교기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성당에도 순교기념비를 세웠습니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 조천읍 함덕리에 순교현양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006년 9월 10일 그의 순교 1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열었고, 그해 10월에는 순교 140주년 기념 가톨릭 합창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또한 2007년 11월 그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순교자 김기량(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67세손) 펠릭스 베드로 종친 기도회’ 창립총회가 종친 후손 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습니다. 2008년 10월에는 그의 순교정신을 기리는 펠릭스 합창단이 다섯 번째 정기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제주교구에서는 자발적으로 순교자 김기량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본받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순교의 길로 나아가자는 순교자의 힘찬 부르짖음을 가슴에 새기는 순교자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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