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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4: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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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2 ㅣ No.39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4)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 (중)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불교적 지혜, 상호보완 이뤄야



사랑이 지혜를 만날 때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 1934~ )는 스리랑카 출신의 예수회 사제로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아시아 신학을 전개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이면서도, 전통적인 소승불교 국가인 스리랑카 출신답게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고 소승불교 연구를 통해 불교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시아 신학이 전개되면 될수록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가 중심적 흐름으로 드러나게 된다. 피어리스 신학의 전반기에는 ‘가난과 종교심의 교차’라는 주제로 ‘아시아의 해방신학’이 개진됐다면, 후반기에는 ‘사랑이 지혜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지난 2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통 복장을 한 스리랑카 신자들과 만나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실천적 해석학

피어리스는 신학이란 한마디로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주로 제3세계 사람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등장하게 됨을 말한다. 여기에서 제3세계 사람들이란 어느 특정 지역의 거주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빈곤과 불의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복음서의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21 참조)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도 1994년의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참조: 마태 11,5; 루카 7,22) 오셨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에 어찌 더 큰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토록 수많은 갈등과 참을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세계에서 정의와 평화에 대한 투신은 희년의 준비와 경축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51항).

피어리스에 따르면, 신학이란 하느님 백성의 가난과 고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단순히 하나의 추상적, 이론적 차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즉, 신학이란 하느님 백성의 해방과 구원에 관한 실천(praxis) 혹은 그 과정(process)에서 기원하고 발전해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범주를 전통적 경계선으로부터 확장해야 함을 피어리스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 신학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아시아의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과 종교심이 교차하는 아시아 대륙에서 해방과 구원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로 확장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시아 신학은 고난받는 아시아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표출돼 담겨 있는 아시아 종교 문화와의 만남과 대화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의 하느님 백성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노력이 담겨 있는 종교 문화들에 주목해야 하고, 그 안에 있는 생생한 체험을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피어리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 백성들의 가난과 종교심이 교차하고 합류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구원에 관한 아시아적 체험들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혹은 ‘해방에 대한 비그리스도교적 체험들에 대한 그리스도적 묵시’(Christic apocalypse of the non-Christian experiences of liberation)를 어떻게 개진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고 피어리스는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해석 작업에 있어, 피어리스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긍정의 길’(via positiva)보다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택한다. 새로운 아시아 신학의 형성이 이론과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단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언어적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비구원적 상태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투신 속에서 참다운 구원의 실재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시아적 종교심이 지니는 특유의 침묵이 말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즉 ‘하느님 체험’(God-experience)이라는 깊은 침묵과 그것이 가시적 언어로 표출되는 ‘인간에 대한 관심’(man-concern) 사이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부정의 길’에 입각한 신학적 전개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연관성을 전제하며, 나아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성을 드러내게 된다고 피어리스는 말한다. 영성은 이론적 신학의 실천적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실천과 투신으로 드러나는 영성이 곧 언어적 신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way)이신 예수님을 직접 따름으로써 진리(truth)이신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생명(life)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6-7 참조).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통 춤을 공연하는 스리랑카 신자들. 피어리스 신학의 전반기에는 '가난과 종교심의 교차’라는 주제로 ‘아시아의 해방신학’이 개진됐다면, 후반기에는 ‘사랑이 지혜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CNS]



사랑과 지혜의 만남

피어리스는 ‘부정의 길’을 통한 새로운 아시아 신학의 형성을 위해,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의 종교심 안에 담겨 있는 구원 사상과 만나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을 강조한다. 사실 불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에게 퍼져 있는 종교 전통이기 때문이다. “내가 불교를 택했다면 그것은 내게 친숙한 분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종교가 문화적 총괄성으로 보나 수적인 세력으로 보나 지리적 분포라든가 정치적 성숙도로 보나 범(汎)아시아적 현상이 돼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도의 정신적 유산이지만 지금은 스리랑카에서만 인도 고유의 형상을 갖추고 있고 실제로는 모든 문화권 속에 침투해 있다. 힌두교와 도교와는 달리 불교는 단일 언어권이나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의 여러 우주적 종교에 스스로 동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불교가 여러 아시아 문화들을 형성해내었다”(「아시아의 해방신학」,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88, 179쪽).

그런데 피어리스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대화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Christian agape)과 불교적 지혜(Buddhist gnosis)의 만남이다. “수도생활의 전통이라는 자리에서 동양이 그 창조적인 침묵을 통해 서양에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 동과 서를 대조시키는 것은 지리적 구분보다는 인간의 불완전한 두 가지 충동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하나가 없으면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구태여 구분한다면 하나는 성경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성경적 종교로서, 그 언어가 하나는 아가페적이고 하나는 그노시스적이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는 언제나 아가페적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합법적인 그노시스가 있었다”(「아시아의 해방신학」, 111쪽).
 
피어리스는 그리스도교에서 본래부터 사랑(아가페)을 강조하는 전통이 주류적 흐름을 이뤘지만, 초대 교회부터 신비적 지혜(그노시스) 추구에 대한 합법적 전통 또한 존재했음을 말한다. 하지만 영지주의 이단의 악영향, 그리고 중세 이후의 지성주의적 신학 흐름과 법률주의적 교회관의 성립 속에서 이처럼 신비적 지혜를 추구하는 신학적 흐름은 약화, 간과됐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오늘날 불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초기 전통의 신비 사상을 재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전기가 마련됐음을 피어리스는 강조한다.

사실, 불교 역시 신비적 지혜를 추구하는 기본 흐름에서 시작됐지만, 보살의 자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등으로 아가페적인 추구의 흐름이 생겨나 내적 상호 보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가페와 그노시스는 구원을 향한 인간의 초월적 추구의 두 가지 흐름이면서도 결국 상호 보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피어리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불교적 지혜의 만남이 세계사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피어리스 신학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1일,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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