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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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영성의 바탕 (2) 성모 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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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25 ㅣ No.1969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영성의 바탕 (2) 성모 신심

 

 

최양업 신부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다른 어느 신심보다 깊이 간직하였다. 그는 성모님을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있어 교회의 모범이 되시는 분으로 공경하였다. 성모님께서는 특히 사제의 영혼이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모성애로 사제들을 모든 위험이나 좌절로부터 보호해 주신다고 믿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 스승 리브와 신부와 함께 “성모성심회”(聖母誠心會)에 가입하여 성모 신심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인간적인 노력으로 헤쳐나가기 힘든 난관을 만날 때면 언제든 성모님의 도움을 구했다. 1849년 5월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백령도 부근까지 왔으나 약속했던 조선 배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때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성모님을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한 것은 1860년 경신박해 때 박해자들로부터 체포될 위험 속에서 다음과 같이 스승 신부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데서도 드러난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최양업 신부는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850년 조선에서의 첫 사목 방문 시, 외교인들에게 포위되어 체포될 위기를 맞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에 자신을 맡기며 기도했다. 성모님의 보호를 특별히 믿고 기도하며 박해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성모님을 인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모셨다. 선종할 당시,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내며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박해 시대의 역경과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되었으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길이 되었다.

 

참조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9.

여진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2006.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8.

 

[2021년 4월 25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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