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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50주년1: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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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1 ㅣ No.395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50주년 (1) 발자취

헌신적 사목 활동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


- 1차, 2차 선교단(1964년)


올해는 한국과 멕시코의 인연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두 나라는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을 맞아 각국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며,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있다. 한국과 멕시코의 특별한 인연은 교회까지도 이어진다. 멕시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는 2012년 한국에 진출한 지 50주년을 맞았다.

가톨릭신문은 가장 필요한 곳에서 가장 낮은 자로서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발자취를 3주에 걸쳐 따라가 본다.
 

과달루페회 두 번째 선교지 ‘한국’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 주교는 첫 번째 선교지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두 번째 선교지로 1961년 10월 한국을 선정했다. 선교사가 사제 20명에 불과했던 선교회의 결정은 큰 결심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교구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이뤄진 한국 선교에 과달루페회는 안요셉, 강요셉 등 두 명의 사제를 파견했다. 그들은 1962년 이억 만 리 한국에 도착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환경도 낯설기만 한 미지의 땅을 찾아온 그들을 부산교구 사제, 신자들은 따뜻한 환대로 맞았다. 덕분에 선교사들은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도 잊고 선교사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에스칼란테 주교와 강요셉 신부(1964년)


하지만 선교사들의 부산생활은 길지 않았다. 선교회는 1963년 가을 안 신부와 강 신부를 광주대교구에 다시 파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만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부산의 협조 아래 생활하던 두 선교사는 선교 무대를 광주로 옮겼다. 안 신부는 여수 서교동 본당 보좌로, 장 신부는 여수 동소동 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세례성사를 통해 본격적인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교세가 점차 확장돼가던 한국교회는 과달루페회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서울대교구에서도 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결국, 선교회는 성수동에 새로운 본당을 설립하고, 어학원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이후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의 활동도 점차 확산됐다. 광주에서는 여수의 두 개 본당 이외에도 순천, 곡성, 벌교, 보성, 소록도 본당 등을 관할했다. 서울에서도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을 위한 사제관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적인 사목의 멕시코 사제들

과달루페회 선교 사제들은 한국 신자들이 가톨릭교회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적’인 사목을 강조했다. 주교회의에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한 스테파노 신부가 한국식 미사를 봉헌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또한 선교회는 멕시코 현지 신학생들도 한국으로 파견했다. 신학생들은 서울 가톨릭대와 광주 대건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토착화된 사목을 펼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사목을 수행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두 번째 성당인 광주대교구 순천 조곡동성당도 성전, 교리, 회합실, 사제관과 사무실, 혼배실 등을 하나의 건물에 갖춘,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설계방식으로 건설했다.

- 5월 매곡동성당(1976년)


선교사들은 경제적 능력과 신앙적 성숙도, 신자 수 등 자급자족이 가능한 모든 본당은 지역 주교에게 양도할 필요성을 느끼고, 보성본당을 광주대교구에 인계했다. 1975년에는 윤공희 대주교와 새로운 선교 계약을 하면서 곡성, 서교동, 조곡동, 지전동본당을 양도하기로 하고, 매곡동, 구례, 벌교, 고흥, 광양, 소록도본당에서는 사목을 계속하기로 했다. 한 해 앞선 1974년에는 다른 교구에서 선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해 노요셉 신부는 부산교구와 계약을 하고 양산본당에서 5년여 동안 활동하며, 한국교회에서의 선교를 확대해 나갔다.

과달루페회의 선교 사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선교 활동도 매우 안정됐다. 본당 관리 운영과 조직, 상담 등에 많은 경험이 축적됐다. 이러한 사목적 노하우는 1980년대 한국교회가 역동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많은 도움이 됐다. 103위 순교자 시성식과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준비하며, 각 본당마다 예비신자들과 단체 활동 신자 수가 확연히 늘어나는 현장을 확인한 과달루페 선교사들은 각 본당에서 헌신적으로 사목을 했다. 특히 여수에 설립된 쌍봉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노요셉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도 없이 주일미사를 인근 아파트 노인정에서 봉헌하며 신자들 곁을 지켰다.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은 좋은 몫을 선택하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헌신적으로 사목을 펼쳤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설립과 활동 - 한국 · 일본 등 아시아 선교에 큰 관심 가져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스페인 선교사들을 통해 신앙을 얻은 멕시코 신자들은 이에 대해 보답하고자 했다. 스페인 침략 시대부터 여러 수도회에서 수많은 멕시코 출신 신부와 수사, 수녀들이 여러 선교지에서 활동했지만 공식적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선교단체는 없었다. 교회는 선교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과 사제들은 멕시코교회에 외방선교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전국 주교들에게 건의했다. 이때 마르케스 대주교와 미란다 주교는 힘을 모아 월간지 ‘선교’를 만들어 보급하며, 선교 사제 파견에 대한 인식을 신자들에게 심어줬다. 하지만 반대가 많았다. 나라의 재정이 넉넉지 못하고, 박해시대(1926~1936)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도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사목할 사제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회에 대한 찬성 의견이 우세했기에 주교회의는 1942년 과달라하라에서 제1차 전국 선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선교대회를 통해 멕시코교회는 외방선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2차 전국 선교대회에서 멕시코 외방선교회와 신학교 설립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1948년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통해 외방선교회의 신학교 설립을 인준하고 선교사 교육을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맡겼다. 신학교 학장으로는 멕시코인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에스칼란테(Alonso Manuel Escalante) 주교를 임명했다.

1949년 10월 7일에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설립식이 거행됐다. 과달루페 대성전에서 멕시코 주교단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된 설립식에서는 열두 명의 신학생들이 회원으로 선서했다. 이들은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하기로 맹세하고, 외방선교회 이름을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라고 명했다. 또한 1950년 ‘알마스’라는 공식 소식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1953녀 교황청 포교성성은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회칙을 인준하고 교황 관할권으로 승격시켰다. 더불어 에스칼란테 주교에게 외방선교회의 초대 총장직을 맡겼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중국 만주 지역에서 약 10년 동안 활동했던 에스칼란테 주교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선교회의 신학생들은 사제품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선교 사제로 파견됐다. 이어 두 번째 선교지로 한국이 정해졌으며, 1965년 아프리카 케냐, 1974년 홍콩, 1980년 앙골라와 페루, 1987년 브라질, 1995년 쿠바 등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현재 180여 명의 회원이 과달루페회에 소속돼 있으며, 90여 명이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22일,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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