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3: 에드워드 스힐벡스 (상)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4 ㅣ No.343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13) 에드워드 스힐벡스 (상)

관념적 신학을 인간 경험 중심으로 이끈 선구자


에드워드 스힐벡스 1979년 모습.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인을 연구하고, 신앙 전통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신학을 연구했다.


에드워드 스힐벡스(Edward Schillebeeckx, 1914~2009)는 교회 역사상 변화가 극심했던 20세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신학적 방법론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적 논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 20세기 신학에 많은 자극을 줬으며, 신학 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 그가 신학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

 
6세때 부터 복사 서며 사제 꿈꿔
 
스힐벡스는 1914년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 엉벨스에서 14형제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무관으로 엄격하지만 자녀들과 토론하고 대화하기를 즐기며 가족 간 소통을 중요시했고, 가족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14명의 자녀들을 키우느라 늘 바빴다. 그럼에도 그의 부모는 형제들이 함께 돕고 서로에게 배우도록 하면서 14남매를 키웠다. 이처럼 좋은 토양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6세 때부터 복사를 서기 시작했는데 복사 서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 영성체 예식 때 종을 치면서 '나도 커서 사제가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나는 행복한 신학자」에서 회고했다.

형제들과 자유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세까지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십대 초반의 가난한 아이들이 그 학교에서 일했는데, 학교측은 스힐벡스에게 이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아이들을 위한 소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노동자 문제에도 눈을 뜨기 시작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읽고 사회 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도미니코회 입회

그의 맏형은 예수회 신부로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은 스힐벡스는 자신도 형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예수회 교육이 너무 엄격했기에 스힐벡스는 1934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그는 도미니코 성인의 생애를 읽고 성인의 기쁨, 세상을 향한 개방적인 자세, 강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 연구 등에 감동을 받고 이 수도회를 선택한 것이다. 수도회에서 2년의 수련기를 마친 스힐벡스는 루방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의 신학 여정은 20세기 가톨릭교회의 변천사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학 경향은 1965~1967년을 기점으로 명백하게 구분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 현상학과 인문과학을 접목한 열린 토미즘 노선을 지닌 전반기와 인간 경험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경험신학을 창출해 낸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새로운 신학을 접하며 연구 매진

스힐벡스가 신학을 시작한 시기는 사변론적인 신 스콜라 신학, 신 토미즘이 여전히 팽배한 가운데 신학을 갱신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는 루방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맡은 드 페터 신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현상학뿐 아니라 당시 토미즘과는 다른 신학적 방법론을 배웠다. 특히 칼 아담의 신학을 소개받았는데 이는 교의신학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과 역사비평을 통해 강생하신 인간 예수, 인성을 지니신 예수, 인간의 심리적 차원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방법론의 그리스도론이었다. 교의를 중심으로 한 사변론적인 그리스도론이 아닌 이 그리스도론은 당시 가톨릭 신학계에선 상당히 획기적이었다.

스힐벡스는 신학과정을 마친 후 박사학위 준비를 위해 1945년부터 2년간 파리에서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숄슈아 도미니코 공동체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훗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이브 콩가르, 마리 도미닉 쉐뉴를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접했다. 스힐벡스는 이들을 통해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당시 로마로부터 강의 금지령을 받은 쉐뉴 신부의 개인적 도움으로 역사비판 방법론을 실천한 때였다. 그리고 소르본대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수학한 기간이었고, 노동 사제들과 만난 기간이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스힐벡스는 루방대에서 「그리스도,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1951)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는 성사론을 역사적 측면에서 분석한 논문으로 신학계에 아주 좋은 반향을 일으켜 여러 언어로 번역됐고, 성사신학 쇄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힐벡스는 1958년 루방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네덜란드 니메그대에서 1983년까지 교의신학과 신학의 역사 등을 강의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선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 대한 고찰이 생소한 것이어서 이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학 쇄신의 필요성을 확신한 그는 여러 어려움에도 이 길을 용기 있게 나아갔다. 다행히 학생들과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은 그를 옹호하고 지지했다.

스힐벡스는 1962년 요한 23세 교황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연설을 듣고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는데, 교황께서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신앙 핵심이 담긴 교회 가르침, 즉 교의(dogma)가 있지만 교의 내용은 내용이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방식이기 때문에 이에 쇄신이 있어야 함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네덜란드 주교단의 공식 대변인으로 적극적으로 공의회 준비를 했다. 그는 공의회가 신학을 쇄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칼 라너, 이브 콩가르, 마리 도미닉 쉐뉴에 의해 쇄신된 신학이 인정받는 계기가 돼 자유롭게 신학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고 회고한다.

그는 전반기에 「계시와 신학」, 「하느님과 인간」, 「결혼은 성사다」, 「세상과 교회」 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리스도,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가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신학 연구 방향 전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 네덜란드 교회에서의 경험과 미국 여행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경험, 그리고 철학자 리쿼와 가다머의 영향은 그에게 현대사회,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직접적 대화를 시도하게 한 결정적 요소가 된다. 이 방향 전환은 「하느님 인간의 미래」(1969)에 잘 드러난다. 이는 토미즘 신학과 결별을 의미한다. 교의신학적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경험을 살펴보는 연역적 방법에서, 인간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경험을 밝히기 위한 도구로써 교의 개념을 살펴보는 귀납적 방법으로 자신의 신학 연구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학하는 방법을 두고 "인간의 경험, 크리스천의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즉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인을 연구하고, 신앙 전통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후반기의 대표적 저서로는 삼부작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다.

스힐벡스는 일반 신자들이 읽을 수 있는 신학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세상과 교회와 관계, 세속화 현상 속에서 신앙 문제 등에 관한 그의 신학적 견해는 일반 신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5년 라너, 콩가르, 큉과 함께 '콘칠리움'(Concilium)이라는 신학 전문잡지를 만들어 새로운 신학을 전파하고자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보수적 성향의 신학자와 사목자들로 인해 1968ㆍ1976ㆍ1984년 세 차례에 걸쳐 교황청으로 불려간 그는 신학의 정통성 여부에 대해 조사를 받았으나 강의 금지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첫 소송에서는 칼 라너가 혼신을 다해 그를 변호해줬다. 특히 사제직 문제, 교회론에 관한 진보주의적 성향으로 교황청의 의심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에는 아무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다만 찬성하지 못하는 몇 가지 점이 있다는 지적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영광스러운 명예상인 '에라스무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에드워드 스힐벡스는 관념적이고 교의 중심적이던 신학 분위기로 신앙 표현이 교리 공식에 고정됐던 교회와 세속화, 현대화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사회 가운데서 적합한 신앙 표현과 가르침을 위해 노력한 신학자다. 그는 신앙 경험이 살아 있는 경험이 되고 교회와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려고 성경뿐 아니라 교회 전통을 통해 내려온 가르침을 현대인에게 맞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상황 신학자'로 볼 수 있다.

* 김미정 수녀
▲ 1978년 고려대 졸업
▲ 1980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 1981년 프랑스 성 안드레아 수녀원 입회
▲ 2000년 프랑스 파리 예수회대 교의신학 전공. 신학박사
▲ 2001~현재 파리 예수회대 교수
▲ 논문 : 「타 종교와의 관계-바티칸공의회 : 한시작의 시작」 「한국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창조주 하느님 개념」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세계를 만날 때 : 유스티노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저서를 중심으로」
▲ 저서 : 「죄와 조화」 「평화와 폭력 가운데」 「이냐시오 영성의 식별과 선교」 「전통의 좋은 사용」 「은총론」

[평화신문, 2013년 8월 11일, 김미정 수녀]


1,95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