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사순 1 주일-나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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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3-09 ㅣ No.395

사순 제 1 주일 (나해)

 

            창세기 9,8-15  1베드로 3,18-22    마르코 1,12-15

 

       2003. 3. 9.

 

주제 : 하느님의 선물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마음을 살펴 내가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잘 실천할 수 있기를 다짐하고 실천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본보기를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질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지만, 우리 인생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받아들이며 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이 평탄치 않은 탓도 있을 것이고, 하루하루가 힘겹다고 가슴 칠 사람들에게 인생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삶이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에도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내가 삶을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 선물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내가 선물을 받을 때의 마음은 어떠했는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오래도록 표현하려고 애쓸 것이며, 적어도 몇 차례는 나에게 선물을 주신 분의 의도를 기억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므로, 답답한 현실에서 좋은 마음을 가지려면 생각보다 월등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가 세상에 사는 일이 아무 재미도 없다고 말할 사람에게 ‘인생은 선물’이 아니고 고역이며 피하고 싶은 걸림돌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빨리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에서 통하는 3대 거짓말을 기억하신다면 그 말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장사꾼, 노인, 처녀의 말)

 

‘로베르토 베니니’라는 이탈리안 감독이 만든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고 상황은 독일의 통치자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따라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려던 과정에서 그 고통의 한 가운데 있던 유대인 아버지가 아들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아니었는데도 무조건 실망하고 주저앉을 것은 아니라는 의도를 전하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를 보신 분이거나 제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이 ‘그것은 영화이니까 현실성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의 인생도 적당히 편집할 수 있다면 영화 한편이 아니라 여러 편을 만들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삶에서 어려운 경험을 한 분일수록 그런 생각은 더 할 것입니다. 먹을 것은 형편없었고, 맘대로 활개 치듯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려고 ‘고향에 가려면 천 밤(1000날)만 지나면 된다고 말하고 실제로 아들과 함께 그 날짜를 셈하기도 합니다. 자기 삶에 보장된 확신이 있기에 그렇게 한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똑같아 보이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삶은 거기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며, 현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려고 하는 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기록한 내용에도 우리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다음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갔다는 일이 그렇고 거기에서 40일 동안 유혹을 받았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분명 성령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분인데, 그 성령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고통과 유혹의 장소인 광야로 내보냈는지 설명도 없고 시련을 겪는 예수님에게 성령이 어떤 힘을 주었는지 설명하는 말도 없습니다. 그렇게 40일을 힘들게 지내신 예수님은 고향 갈릴레아로 돌아오자 ‘자신을 고통으로 몰았던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선포합니다. 혼자만의 안락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라면 예수님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고, 생각나는 대로 불신의 소리를 외치고도 남을 모습의도를 가질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을 바꿨는지는 모릅니다.

 

삶의 모양을 바꾸는 것은 목청 좋은 어떤 사람이 큰소리친다고 해서 갑작스레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창세기 독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약속대로 사람은 자연과 화해하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이란 게 다른 사람의 말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강하게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하려는 존재들이기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합의 모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좋다고 인정할 꼭 필요한 일에 조차도 사람들은 자기 몸의 편리성을 들어 지금 당장은 반대의 소리를 내는 일이 많은 법입니다.  

 

두 번째 독서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례를 받은 일에서부터 세상의 변화는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이 미사에 오신 많은 분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분들일 것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어떤 삶의 모양으로 살아야 하는지 아는 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안다는 일과 행동에는 항상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이 일 때문에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는 힘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 자신의 삶을 드러내야 올바르겠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느님의 의도도 묵상하고,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 불만과 아쉬움 대신에 세상을 위한 화해의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의도도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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