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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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01 ㅣ No.317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1)


교회역사에서 아리우스 이단만큼 그리스도교 자체를 뒤흔들어 놓고, 오랫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이단은 없다. 사실 니체아 공의회가 이 이단 때문에 개최되었으며, 4-5세기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 이단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아리우스의 생애와 저서

아리우스(256-336)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에 가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루치아누스를 창시자로 여기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사제품을 받고 바우칼리스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318년부터 그는 성부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이시며, 따라서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요지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같은 잘못된 주장은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그의 설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고 정통신앙을 고백하도록 여러 차례 권고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델은 318년에 이집트 지역의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100여명의 주교들과 함께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안티오키아의 동료들 중에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자기 주장을 계속 펼쳐나갔다. 그의 동조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있었는데, 니코메디아는 당시 황제가 거처하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에우세비우스 주교의 영향력은 컸다. 아리우스는 자기에게 내려진 단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서간]을 318년에 쓴 다음 니코메디아로 피신하였다. 또 320년에는 니코메디아에서 자기 주장을 항변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에게 보낸 서간]을 썼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부르기 쉬운 노래와 시들로 만들어 [향연]이란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2010년 10월 24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청주주보 4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총대리 겸 강서동 본당 주임)]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2)


아리우스 이단논쟁은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지역적인 대립이 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 나머지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통일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회역사에서 최초로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에는 30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아리우스를 일리리쿰으로 귀양보냈다가 328년에 풀어주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는 336년 화해 절차를 밟도록 정해진 전날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결국 파문을 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느님이면서 어떻게 한 분의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성삼론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알아듣기 가장 어려운 교리인데, 아리우스는 이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성을 지닌 하느님이 되려면 창조되지 않은 분, 나음을 받지 않은 분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나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리우스의 이론을 따르면 성자 그리스도는 성부의 첫 번째 피조물이며, 다른 피조물들처럼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2010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청주주보 4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총대리 겸 강서동 본당 주임)]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3)


둘째, 성자가 나음을 받기 전, 즉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런 이유에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공적을 미리 보시고 그를 단지 입양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주장이었다. 넷째,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성부는 성자를 단지 창조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성자를 통해 창조된 첫 번째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우스는 난해한 성삼의 관계를 논리적이면서도 매우 알아듣기 쉬운 도식으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성자의 신성, 육화와 구원의 신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주교들은 [니체아 신경]을 제정하고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 즉 동일한 천주성을 지니고 계시다고 역설하였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우선 화급한 문제인 성자의 천주성에 관한 교리가 선포되었으며, 성령의 신성문제는 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 제2차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 아리우스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약화시켜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소위 “半아리아누스이단”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세기를 두고 계속되다가 칼체돈 공의회(451년 : 제4차 공의회)에 가서야 우리가 오늘날 고백하는 삼위일체교리가 확정되었다. [2010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 청주주보 4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총대리 겸 강서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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