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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2: 숨어 계신 하느님을 향한 신학적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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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06 ㅣ No.320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 ‘숨어 계신 하느님’을 향한 신학적 추구

긍정 · 부정의 두 가지 신학 흐름, 상호보완 이뤄야


신학은 인간의 신앙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성적 작업이다. 즉, 신학은 교회가 신앙으로써 보편적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적 계시에 대한 학문적 성찰이다.

하지만 신학적 탐구 여정에는 반드시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 안에서 크게 두 가지 범주의 신학적 흐름이 있는데, ‘긍정의 길’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긍정신학’과 ‘부정의 길’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이다.

중세 이래 주류를 이루었던,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을 명시적인 언어로써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서구 전통의 지성주의적 신학은 현대 세계의 비극적 사건들과 다원적 흐름들을 겪으며 도전을 받는다.

즉, 모든 것을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긍정신학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부정신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부정신학, 인간 지성의 한계 인정

부정신학은 신학이나 하느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신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감각과 유보이다.

즉 이성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적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인간이 결코 알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의 영역을 남겨 두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의 길’이란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지성적 접근을 폄하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접근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이 말했듯이, 우리의 한계적 지성에 의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벌써 2천 년이 넘게 지났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조롱 섞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어둠과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금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마음 아파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세상 안에서는 수많은 불의가 자행되고 악의 실재가 번창하며,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기계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시면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이 고통스러운 구원의 신비를 우리는 신앙적 직관으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학은 경우와 필요에 따라 매우 정당하게 부정신학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현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자리한 부정신학적 흐름에 대한 성찰과 재발견이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탐구 여정과 그 고귀한 신학적 작업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최근에는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사적 성찰에 있어, 일견(一見) 서방신학의 전통 안에서는 주로 긍정신학의 흐름이 우세하였고 동방신학의 전통 안에서는 주로 부정신학의 흐름이 우세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쉽게 규정될 수는 없다. 사실, 서방신학과 동방신학 모두에서 두 가지 흐름은 각기 명맥을 유지해왔다.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전통 안에서 부정신학적 방법론은 분명히 그 맥을 이어 왔다. 동방과의 대분열이 일어난 11세기 이후 조직신학적 측면에서는 부정신학적 흐름이 거의 차단됐지만, 영성신학적 측면에서는 명맥을 이어왔다. 영성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신비체험과 부정신학은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완덕을 향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성성(聖性)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있어, 피조물인 인간이 한계를 넘어서 성성의 최종 목표이자 원형인 하느님을 이해하고 인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신비사상에서는 하느님 인식을 위한 부정신학적 방법론을 적극 차용하게 된다.

비록 인간 영혼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다가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만 알아도 인간 영혼은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비유나 시의 형태로 하느님을 향한 신비적 지혜가 표출되기도 한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치 새가 두 날개로 날아가고 인간이 두 다리로 걸어가듯이, 하느님을 향한 인식의 여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신학적 흐름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긴장 속에서도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은 결코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직접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하시는 하느님’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숨어 계신 하느님’,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그리고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 안에서 이 흐름의 근원을 살펴본다면, 우선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중 특히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40~394 이후)가 전개한 신비신학에서 부정신학적 경향이 발견된다. 물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이러한 부정신학적 신비사상을 아주 독창적으로 창출해 낸 것은 아니고, 300여 년 이전의 유다교 사상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기원전 20~기원후 42 이후)의 접근법으로부터 어느 정도 방법론적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사에 있어 부정신학의 흐름을 본격적으로 정립시켜 중세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바로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500년 경 사망)이다.

국제신학위원회의 2012년 문헌인 ‘오늘의 신학:전망, 원칙, 기준’에서는 본문 마지막 부분(86~99항)을 통해 이러한 부정신학적 흐름의 정당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선 ‘오늘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지혜를 설명함에 있어,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철학의 순전히 인간적인 지혜를 초월하는 이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라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것이지만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91항)

하지만 이 두 지혜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임을 강조한다.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는 형상적으로 구별되며, 이들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신비적 지혜는 결코 신학적 지혜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 개인 안에서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나 그리스도교 지혜의 이 두 가지 형태 사이에 긴밀한 연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92항)

긍정신학적 맥락에서 강조되는 ‘신학적 지혜’란 무엇인가? 신학적 지혜란 한마디로 “신학자의 이성적 작업에서 나오는 지적 관조”를 의미한다.

“신학적 지혜는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신앙의 선물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습득된 지혜이다.”(91항).

-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주례한 국제신학위원회 회원을 위한 2009년 미사 모습. 국제신학위원회는 2012년 문헌 ‘오늘의 신학…’에서 부정신학적 흐름의 정당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부정신학적 맥락에서 강조되는 ‘신비적 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개념적인 지식으로서의 ‘신비적 지혜’는 ‘성인들의 지혜’라고도 불리며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성령의 선물을 뜻한다.

“이 지혜는 관상으로, 그리고 평화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로 인도한다”(91항).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차적 실재는 하느님의 계시이기에, 창조와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적 경청의 결과로 가능해지는 긍정신학은 신학의 우선적인 출발점과 방법론이 된다.

하지만 신학의 여정 안에서 결국 부정의 길과 언어의 부재를 또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의 구원적 신비 앞에서 느끼는 표현 불가능한 경외감 때문이다. 언어로 온전히 말하고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믿는 이들은 사랑으로 이미 그 신비에 참여하여 그 신비를 느끼고 그 신비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98항 참조).

“신학은 마땅히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참되게 말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식이 참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의 실재와 관련해서는 부적합한 것임을 안다.”(97항).

결국, 신학의 본질적 과제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향한 우리의 전적인 투신이요 겸허한 추구를 의미한다.

“하느님 신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참된 지혜를 찾으려 노력함에 있어, 신학은 하느님의 전적인 우선성을 인정한다. 신학은 하느님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소유됨을 추구한다. 신학은 거룩함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 신비의 초월성에 대해 점점 더 깊어지는 의식을 향한 노력을 내포한다.”(99항)

*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과 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7일,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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