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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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교부들의 명언: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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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324

[교부들의 명언]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Pondus meum amor meus).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인류가 배출한 가장 훌륭한 천재들 가운데 한 명인 아우구스티노의 이 말씀은 「고백록」 13권 9장에서 발견된다.

성인의 대표적 저서로서 ‘하느님께 보내는 긴 편지’인 「고백록」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요 흠숭의 찬가이며, 감사 행위이고 사랑 고백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향해 자신의 과거사를 묘사하면서 인간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활동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유로, 가에타노 네그리가 평가하듯, 모든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고, 인류정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무게’와 ‘사랑’

찬미 고백이요 죄의 고백이며 신앙 고백의 맥락 안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노는 “당신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안식하는 것, 거기에서 당신을 누리는 것, 우리 안식이 바로 우리 자리인 것”이라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무게’에 대해 설명한다.

“물체는 제 무게 따라 제자리로 기울고, 무게란 밑으로 미는 것만이 아니요, 제자리로 기우는 것. 불은 위로 당기고, 돌은 아래로,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 물속에 버린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던진 물은 기름 아래로 잠기니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각 사물이 갖고 있는 무게는 그 사물이 자신의 자리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로 기우는 것이 바로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가 있는 곳에 안식이 있다. 곧 우리의 안식이 우리의 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인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그 자체로 욕구한다는 것이다. 곧 사랑은 어떠한 대상을 향한 움직임(motus ad aliquid) 또는 욕구(appetitus) 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랑은 의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그 누구에 의해 강요받지 않으면서, 어떤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또는 획득하려는 영혼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곧, 의지는 어떠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영혼의 능력(potentia animi)’인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불변하는 선에 결속할 수도 있고, 열등한 선에로 전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상위의 사물을 택하거나 하위의 사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의지적이며 동시에 선택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 1권 1장에서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합니다.”라고 강조한다.


사랑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

사랑이 어떠한 대상을 향한 움직임이라면, 어떠한 대상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향유’(frui) 와 ‘사랑’(uti) 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랑의 질서’를 제시한다.

성인에 따르면, “현세적 사물들을 사용해야 하며, 영원한 것을 향유해야 한다”(「설교집」, 36,6).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것들은 최고선에 도달하고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마태오 복음 22,37-39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 계명과 연결시킨다면, 하느님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녀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영적인 눈으로 이웃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을 보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구원에로 이끄는 인간 삶의 규칙이 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질서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는 것, 곧 사랑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가 없다면 불안이 생기게 되고, 이 질서가 잘 지켜진다면 평온이 있게 된다.

사랑의 질서가 갖는 중요성은 사랑이 지닌 능력에서도 등장한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대상이라는 두 존재를 일치시키는 생명력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는 어떤 사랑을 지니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된다고 강조한다(「요한 복음 강해」, 2,14 참조).

이는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 지니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시키고,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사랑은 하느님께 이르는 확실한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의 하늘이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끔 한다. 우리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영혼의 움직임과 모든 육적 충동들이 진리요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분께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며, 빛을 밝혀주시는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그리고 우리가 불멸의 나라에 이르도록 사랑의 무게 밑에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설교집」, 228,2).

* 변종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교황청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부학과 고 · 중세 교회사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교부학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변종찬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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