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신앙과 정치: 파국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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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6 ㅣ No.1317

[신앙과 정치] 파국과 구원

 

 

지난 3월 초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 대결을 벌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국장 모습이었다. 이세돌 9단 맞은편에 앉은 아자황 박사는 인공지능 개발에 참여하는 연구원으로, 화면을 보면서 알파고 지시에 따라 돌을 반상에 올려놓았다.

 

인간은 다섯 판을 두어 겨우 한 번 이겼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다. 인간과 기계가 벌인 ‘세기의 대국’ 이후, 말세에 대한 탄식과 두려움, 그리고 어설픈 위로가 이어졌다.

 

이 대국을 지켜보면서 나치에 쫓겨 피레네산맥을 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단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년)가 떠올랐다. 이 글에 나오는 서양장기를 두는 자동기계 인형 우화 때문이다. 자동기계는 장기를 둘 때마다 알파고처럼 상대의 허를 찌르는 “반대수로 응수하여 언제나 그 판을 이기게끔 고안되었다.” 그런데 이 기계장치 안에는 장기 고수인 난쟁이가 들어앉아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

 

벤야민은 자동기계 인형은 ‘역사적 유물론’으로, 난쟁이는 ‘신학’으로 빗대면서, 역사적 유물론이 “오늘날 주지하다시피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신학을 자기의 편으로 고용한다면 어떤 상대와도 겨루어볼 수가 있다.”고 했다.

 

 

시대의 우울, 하느님의 자리에 들어선 자본

 

언급하기 쉽지 않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협업을 강조한 벤야민의 천재적 통찰 또한 우울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19세기 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교회는 신의 무덤이 되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 강력한 종교적, 주술적 힘을 지닌 물신 자본주의가 들어섰다.

 

벤야민의 눈에 파리의 아케이드는 ‘자본주의 최초의 신전’이었다. 쇼윈도가 보여주는 현란함은 자본주의의 거품과 야만적 공포를 은폐했고,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리스도교는 자본주의가 기생할 숙주였지만, 자본주의가 물신의 자리에 오르자 그리스도교 자체가 자본주의화되었다.

 

배타적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듯이, 교환 과정에 들어서면 자본은 이익 추구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확장과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어딘가 닮지 않았던가.

 

물신의 시대, 시장이 먼저고 사람은 그 다음이다. 자본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인간은 너무나 쉽게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하였다. 소모품이 된 인간들은 “‘착취된’ 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복음의 기쁨」, 53항)이다.

 

경제성장이 ‘낙수효과’를 유발해 세상을 더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들 것이라는 환상은 이미 깨졌다. 물신주의 세상은 “비인간적인 ‘경제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복음의 기쁨」, 55항)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윤리의 부재, 하느님을 거부하는 악마적 현상을 초래한다는 교황의 날카로운 지적은 벤야민의 시대와 시차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자본주의가 꿈틀거릴수록 사람들의 ‘걱정’은 늘어나고 보편화한다고 본 벤야민은, 이를 자본주의 시대의 고유한 정신병으로 보았다. 이 ‘걱정’은 개인적이고 물질적 차원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참조). 그렇게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고, 파시즘을 용납했다.

 

벤야민은 생계마저 위협받는 위태로운 삶에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파시즘에 전율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박사학위는 있으나 교수자격 논문 통과 거부로 강단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국외자로 살아야 했다. ‘더는 숨쉬고 싶지 않은 공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1933년 나치가 집권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그에 따른 굴욕적인 조약, 경제 불황과 대공황, 정치적 혼란 등이 겹친 독일의 구세주로 포장되었다. 그리스도교는 히틀러의 손을 들어주었고,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에 빗대기도 했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개신교의 국가교회가 그렇게 등장했다.

 

교회에서 하느님이 사라지자, 그리스도교는 노예 종교의 면모를 복원했다. 교회의 안위를 위해 독재자와 타협하고 광신적 애국심을 부추기는 민족주의에 동의하였다. 바티칸은 히틀러, 무솔리니와 정교협약을 체결하면서, 국가는 성직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대신 교회는 파시즘에 침묵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하느님은 세상에서 점점 더 자취를 감추었고, 유럽의 교회는 늙고 병들어 갔으며, 많은 신자가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시즘을 묵인하고, 아우슈비츠 학살에 침묵한 교회에 책임을 물었다. 농부의 아들 요한 23세 교황이 바티칸의 창문을 열기까지 가톨릭교회의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결을 거슬러 솔질하며 구원의 문을 열다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자.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는 벤야민의 마지막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편의 핵심 개념은 ‘구원의 이미지’이다.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신학의 훈수를 받은 역사적 유물론자는 미래가 아닌 과거가 지닌 ‘메시아적 힘’을 포착해야 한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서 ‘은밀한 지침’이 지배자의 손에 들어가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쉽게 조작된다. 그래서 현재의 승자들은 과거를 지배하려 든다. 미래도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를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으로 명확히 규정한다. 그것은 죽기를 각오한 저항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길을 벗어난 지배자에 저항했던 예언자와 역사적 유물론자의 모습이 교차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왕정 시대와 예언자 시대는 함께 존재했다. 예언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통하여 어떻게 구원이 오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느님 백성의 미래는 과거를 오늘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예언자들은 그 사실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교회의 신앙 유산은 꼭꼭 숨겨두었다가 선택된 소수가 필요할 때마다 전시하는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이 아니다(「복음의 기쁨」, 95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 유산은 ‘살아 있는 원천’이라 했다. 그러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진” 신앙의 원천은 벤야민이 말한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가득한 ‘지금 시간(Jetztzeit)’으로 현재를 규정한다. 역사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시간으로 충만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래는 “초마다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 된다.

 

벤야민에 따르면 지금 시간은 동질적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는 혁명의 시간이다. 역사의 전승을 소유함으로써 현재를 지배하던 예루살렘의 지배 엘리트의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에 맞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의 판을 뒤집어엎듯이 주변부의 가난한 이들의 ‘지금 시간’을 통해 지배자의 판을 부수었다. 그것은 역사의 단절이요 파국이었고, 그 시간은 구원의 질적인 때였다.

 

벤야민의 역사 개념은 메시아적이다. 메시아는 연속적이고 직선적인 역사 발전의 종점에 등장하지 않는다. 메시아는 상투적이며 타성에 젖은 역사관을 뒤엎고 연대기적 역사를 단절시켰으며, 구원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역사적 시간을 재구성한다. 이로써 기억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며, 충분히 변형할 수 있다.

 

과거의 사건은 필름처럼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일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이 그렇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그렇다. 메시아의 시대는 순응주의의 위협에 맞서 과거의 기억과 전통을 구원하는 정치적 투쟁의 시대이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이란 ‘세계사의 전동차’였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 주변부의 외침을 경청하라는 충고이다. 또한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모든 변화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라고 주문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도발적인 예언자로 역사의 지속성을 파괴하고 ‘지금 시간’을 질적으로 고양해, 순간마다 구원의 문을 여는 자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가진 이의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 진행과정을 폭파시켜 ‘지금 시간’을 인류 역사의 총체와 관련시킨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벤야민의 생각에 대한 지나친 오해일까.

 

“구원은 거대한 제국의 변두리 작은 마을에 사는 보잘것없는 처녀가 말한 ‘예.’를 통하여”(「복음의 기쁨」, 197항) 왔듯이 말이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5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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