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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사회교리: 가난 - 빈부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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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214

[사회교리] 가난 - 빈부격차

 

 

가난이란 말은 참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그 중 물질적·경제적 가난을 문제로 삼을 것이다. 물질적·경제적 차원에서 가난이란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써 빈곤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세상에는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왜 가난한가? 사람들은 가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는 이유는 게으르고 비위생적이며 일하기 싫어하고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머리가 나쁘지도 않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어 가는 데 반해 가난한 사람은 사회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더욱 가난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이는 가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난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1. 가난의 역사

 

가난 혹은 빈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문제이다. 수렵채취생활을 하던 구석기인들은 그 날의 운에 따라 굶을 수도 있었고 배부르게 먹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생활은 기아에 대한 불안함을 몰고 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축을 기르는 목축생활을 시작하였다. 유목생활은 수렵채취생활에 비하여 안정적으로 음식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축생활 역시 풀을 찾아 헤매는 고달픔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궁핍하고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인간은 농경사회를 구축하게 되었다.

 

안정된 농경사회의 생활 역시 인간에게 완전한 풍요로움을 제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부자와 빈자의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또한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은 삶의 편익을 위하여 더 많은 생활도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삶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사회로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공업사회는 인간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제공했지만 이제 인간은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서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문화와 정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문화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정보통신사회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상과 같이 인류의 역사는 기아(식량의 빈곤)의 위협을 받는 절대적 가난, 안정적인 생활의 빈곤, 삶의 편의성 빈곤 등 물질적 가난의 극복과정을 걸어왔으며, 이제 정보와 문화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정보와 문화의 가난을 극복한다면 영적 가난을 극복하려는 사회가 대두될 것이다. 영적 가난을 극복하려는 사회는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신앙의 결핍, 사랑의 결핍, 희망의 결핍)를 극복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순리적으로 발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아직 기아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아직 11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다. 세상의 한쪽에서는 기아의 위협을 받는 절대적 가난에서 헤매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정보와 문화의 가난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전세계의 식량이 모자라서 기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쪽이 굶주리거나 지독하게 가난한 이유는 다른 한쪽이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가난한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것조차 가지지 못한데 비하여 부유한 사람들은 갈수록 더욱 더 많이 소유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부의 편중현상이라고 하며 흔히들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 현상이라고도 한다.

 

 

2. 부의 편중 현상

 

빈부의 격차는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일어날 뿐 아니라 한 국가 안에서도 일어난다. 이러한 빈부의 격차가 세월이 가면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격차가 더욱 커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선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빈부격차를 알아보자. 올해 4월 10일 유엔개발계획(UNDP)이 세계 반(反) 빈곤 도시연합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3대 부자 3인의 보유 자산은 49개 최빈개도국에 거주하는 6억 명의 연간 소득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미국 포브스지 선정 세계 3대 갑부(2002년 3월 기준)는 1위 빌 케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5백28억 달러), 2위 워런 버핏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3백50억 달러), 3위 칼테오 알브레히드 독일 알디 슈퍼마켓 소유주(2백68억 달러)이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최상위국 20% 인구와 최하위국 20% 인구의 소득 격차는 60년대 30대 1에서 97년 74내 1로 커졌으며 2015년 150대 1로 확대될 것으로 나타났다.

 

한 국가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 역시 더욱 커지고 있다. 1986년 미국 주교회의가 펴 낸 사목교서 <만민을 위한 경제정의(Economic Justice for All)>에 의하면 미국에서 2%의 최고 부유층이 전체 국민소득의 28%를 차지하고 있으며, 10%의 부유층이 총소득의 54%를 장악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최하위층 20%의 가정이 국가 총소득의 4.7%만 차지하고 있다. 2002년 4월 24일자 <뉴욕 타임즈>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상위 20%의 가계 평균 소득증가율이 하위 20%의 소득증가율보다 높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빈부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통계청이 해마다 발표하는 ‘도시 근로자 가구 가계수지 동향’에 따르면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인 1997년 3분기 상위 20%의 평균소득은 4,491,000원으로 하위 20%의 평균소득 1,000,000원의 4.49배였다. 1999년 3분기에는 상위 20%의 소득이 4,370,900원으로 하위 20%의 828,000원의 5.29배에 이르렀다. 2002년 1분기에는 상위 20%의 소득은 5,633,400으로 하위 20%의 1,043,700원의 5.4배에 이른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국가와 국가의 빈부의 격차와 한 국가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커지고 있다. 그 이유는 가난한 국가나 가난한 사람을 옥죄여 오는 가난의 사슬 때문이다.

 

 

3. 가난의 사슬

 

가난한 국가나 가정은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가난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가난의 사슬(가난의 굴레, Circle of the poverty)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우선 수입이 적다. 수입이 적으므로 식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부족한 식생활로 인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며,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은 쉽게 질병에 걸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난한 살림에 가족들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치료를 위해 낮은 수입을 사용해야 하고 이로 인해 가계는 더욱 압박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질병은 노동력까지 상실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수입은 더욱 낮아지고 낮아진 수입으로 인해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없게 된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녀는 또 다시 낮은 수입으로 인해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가난은 하나의 사슬, 즉 가난 - 굶주림 - 영양실조 - 질병 - 노동력 상실 - 낮은 수입 - 교육비 감소 - 더욱 가난해지는 순서를 밟게 되어 하나의 사슬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가난의 사슬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게 된다.  이러한 가난의 사슬을 개인의 힘으로 끊어버리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사회의 모든 분야의 의사결정에서 밀려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주장할 수도 없는 밀려난 사람(emarginanti)으로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주거지조차 도시의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들이 서울의 신림동 산동네를 비롯하여 대도시 주변에 펼쳐진 산동네로 몰려들고 있다. 이들이 이런 곳에 몰려드는 이유는 값싼 주거비 때문이다. 값이 싼만큼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열악한 환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4. 글을 맺으며

 

사회가 존속하는 한 가난한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빈부의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빈부의 격차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르크스(Marx)와 같은 사람은 공산주의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인류를 더욱 가난하게, 더욱 비인간적인 사회를 만듦으로써 인류 역사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부유한 자의 자산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빈부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가난의 사슬은 한 국가의 힘이나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난한 국가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도록 단체와 국가가 도와야 한다. 가난의 사슬을 끊는 도구는 연대성이다. 가난한 국가와 선진국 사이의 연대성과 보조성의 원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의 연대성과 보조성의 원리가 실현될 때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성을 지니고 계셨다.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연대의식을 지녀야 하며 그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가난의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월간 빛, 2002년 9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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