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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수도 ㅣ 봉헌생활

카르투시오수도회의 위대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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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385

[현장 취재] 카르투시오수도회의 위대한 침묵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눈 덮인 산골 마을은 한낮에도 고요하기만 하다. 경북 상주시 모동면 반계리, 산곡산 들머리에 이르러 두어 구비 산길을 걸어 올라가자 비로소 작은 철문이 보인다.

이곳의 외국인 수도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안동교구 안상기 미카엘 신부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조립식으로 소박하게 지은 독방[修室]과 작업장, 긴 회랑이 이어지는 카르투시오수도회 특유의 건물이 눈을 이고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얼마 뒤 저 아래 골짜기에서 미색 수도복을 입은 두 명의 수도자가 산모롱이를 돌아 천천히 걸어 올라온다. 마치 영화 ‘위대한 침묵’의 주인공들이 화면 밖으로 나온 듯하다. 원장 갈리쉐 요한 바오로 신부와 베드로 신부이다.

한낮의 따스한 겨울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는 손님맞이 방에 마주앉았다. 주교회의 사료실 권정애 크리스티나 씨가 프랑스어 통역을 맡아주었다.

원장신부가 “답변서를 불어로 썼습니다.” 하고 파일을 내밀며 우리말을 한다. 컴퓨터로 꼼꼼히 작성한 자료를 보고 놀라워하자, 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현대 기술을 받아들여 선용하라는 회헌이 있다고 말한다.

햇살에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선홍색 귓불, 기름한 손가락이 인상 깊다. 말수가 적고 엄격한 모습이리라 지레짐작했는데 자못 따스하다.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며 웃는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두어 시간 인터뷰가 이어졌다. 너무 긴 시간 침묵을 깨트리게 한 듯했지만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 기도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별로 어려움이 없다며 웃는다. 결혼생활을 해보니 수도생활이 부럽다며 농담을 건네자 원장신부 곁에 앉아 줄곧 침묵을 지키던 스페인 출신의 베드로 신부가, 둘 다 어렵다며 “아주아주!” 하고 서툰 한국어로 거든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갈리쉐 신부에게 ‘길이세(吉利世)’, ‘세상을 이롭게 하고 길하게 한다.’는 뜻을 담아 한국 이름을 지어 드리자 기뻐하며 쪽지를 챙긴다.

한국어로 함께 주모경을 바치고 나서 매서운 겨울 추위에 건강히 계시라고 하자, 프랑스의 모원인 그랑 샤르트뢰즈는 10월부터 부활 때까지 춥다며 웃는다.

“세상은 변천하고 십자가는 남는다”(카르투시오회 모토). 930여 년 전, 교수직을 버리고 주교 제안도 마다하고 어지러운 사회와 성직매매로 시끄럽던 교회를 뒤로 하고 은둔의 길을 택한 브루노와 여섯 동료들.

지고의 고독과 침묵 속에 믿음의 벗들과 ‘따로 또 같이’ 살며 용맹정진한 7인의 후예들이 이 땅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처럼 걸어온 길도 가야 할 길도 모두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 사는 이곳 반계리. 수도원 들머리에 사는 농부 시인 정의선 토마스 씨가 건네준 시집 「포도향기 가득한」에 이곳 지명의 유래에 관한 시구가 보인다.

“과거 보는 선비님 / 이제 / 온 만큼 가면 된다. / 시냇가 대님 풀고/ 반기한 잔치 막걸리에 / 어사화 어른거리던 반진계(半盡溪).”

추풍령 옛길,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의 중간에 자리 잡은 ‘성모의카르투시오수도원’, 부귀영화를 꿈꾸며 번화한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쉬어가던 반진계를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어둠이 내려도 도시는 마냥 소란하기만 하다.


카르투시오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이유는?

유럽 외에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카르투시오수도회가 있다. 이 세 곳은 20세기에 세워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 우리의 카리스마를 다른 대륙과 나누라는 초대를 받았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교회의 충만한 현존과 관련되므로 신생교회들에서는 어디서든지 관상생활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선교교령(40항)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자문했다.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것처럼 아시아에는 관상의 전통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은수생활의 카리스마를 아시아에 전해주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총장신부와 참사회는 두 명의 수사를 아시아에 보내 수도회 설립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했다.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에서는 선교사들에게 영구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오래된 필리핀과 짧긴 하지만 교회가 매우 역동적인 한국을 살펴본 뒤, 우리의 은수생활을 한국인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불교의 승려제도에서 보듯이 한국 문화에는 내적 생활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 진출한 지 10여 년, 감회는?

우리 두 명은 모두 프랑스의 그랑 샤르트뢰즈 수사들이었다. 우리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99년 10월 9일이었다. 도착 이후 수도원을 공식적으로 개원(2004년)하기까지의 기간은 매우 힘든 시기였다. 우리 두 프랑스 수사들은 한국 문화나 법, 행정규범, 특히 언어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로 한국에 왔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언어는 한국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초기에는 한국인들에게 우리가 이 나라에 온 이유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가 ‘외국인’이었으므로 일차적인 문제는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장 수도원을 짓는 문제에 접근하기보다는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서강대학교와 학원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 교습을 받았다. 이러한 언어 공부에만 전적으로 3년 이상 매달렸다. 그와 동시에 수도원 부지를 찾아야만 했다.

수도원을 지을 시기가 되자, 여러 가지 난관에 직면했다. 행정적인 면에서는 토지 사용에 관한 정부의 공식적인 방침과 마찰을 빚었다. 한국은 자연을 보호하고, 농지를 보호한다. 이러한 농지에 큰 건물을 짓는 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은둔 성소는 우리 수도원을 매우 고립된 지역에 짓도록 요구한다. 게다가 수사들이 저마다 작은 정원이 딸린 작은 집에서 따로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독방들이 열 개 정도 늘어서 있는 공간을 생각해 보라. 이는 수도원 한 채를 짓는 데 대한 행정적 제한을 훨씬 넘어서는 공간이다. 따라서 공무원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했고,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더구나 그것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이 아니던가.

우리는 공식적인 허가가 나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러한 허가가 날지 어떨지도 알지 못한 채…. 한마디로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준 것은 바로 한국에서 만난 참된 친구들이었다. 먼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시기에 카푸친 형제들이 오랫동안 수도원에서 머물도록 허락해 주고, 다방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수도원 창설과 관련해서 주교님들이 우리를 신뢰해 주셨다. 우리를 주교님들께 소개해 주신 분은 바로 두봉 주교님이시다. 두봉 주교님은 프랑스에 있는 우리의 모원인 그랑 샤르트뢰즈를 잘 알고 계셨다.

당시 광주대교구장님(최창무 대주교)은 우리의 한국 정착을 위해 스스로 보증인이 되어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광주대교구에서 적합한 부지를 찾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교구에 수도원을 설립해야 했고, 그런 우리를 받아주신 분이 바로 당시 안동교구장이던 고 박석희 주교님이셨다. 현재의 안동교구장님(권혁주 주교)도 우리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계셔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수도원 부지는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에서 예전에 수도원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던 모동 근처의 땅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었다. 그리고 수도원이 완성될 때까지 모든 행정적 기술적 문제들에서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사심 없이 우리를 도와준 모든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몇 명이 함께 사나? 일과표는?

10명이다. 종신서원자는 6명, 독일과 스페인 등 모두 유럽 출신이다. 신부가 4명, 평수사가 2명이다. 한국인 수련자가 4명 있다. 성소 식별 피정을 거친 성소자들은 지원기, 청원기, 수련기, 유기·종신서원기의 단계를 거친다. 청원자 한 명이 다음 주부터 생활을 시작한다.

카르투시오회는 하나의 공동체이지만 두 부류로 조직되어 있다. ‘봉쇄수사’는 좀 더 강도 높은 은수생활을 한다. 하루에 세 번 성당에 전례를 거행하러 나오는 것 말고는 하루 종일 침묵하며 독방에서 지낸다. 평수사는 오전과 오후에 하루 5시간 동안 독방에서 나와 노동을 한다. 전례 때 말고는 그들도 독방에서 지낸다. 주일에는 공동생활 부분이 좀 더 많다. 월요일에는 독방생활로 긴장된 몸에 활기를 주고자 산책을 하면서 둘씩 번갈아가며 만나 대화하며 공동체의 형제적 일치를 든든히 한다.

우리 전통에 따르면 모든 봉쇄수사들이 사제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체 내에서 하나의 봉사일 따름이다. 브루노 성인도 처음에는 사제가 아니었다. 카르투시오회에서는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신학교에 보내지 않고 수도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교육을 한다.

한국에서의 일과표는 그랑 샤르트뢰즈의 일과표와 본질적으로는 같다. 다른 카르투시오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각 수도원은 시간표에서 약간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유럽에서도 큰 공동체(20명)와 작은 공동체 간에 차이가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은 공동체들에서는 수련자가 서원자들과 덜 분리되어 있다.


한국에서 살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은?

수도원 건축과 관련된 고생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 우리는 한국인의 성격에서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교회의 활력과 결집력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 생각에 한국인은 깊고 단단한 우정을 맺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또한 매우 관대하기도 하다. 거기에는 물질적 차원도 포함되지만, 마음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본다.

두봉 주교님도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는 악마가 한국어를 발명한 듯하다고 하셨다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이다. 나는 한국인 청원자 양성을 맡고 있는데 한국어로 강의를 하기에 미리 사전을 찾고 준비하느라 애를 먹는다. 유럽 출신 수사들은 제2 외국어인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은 우리 안에 상대에게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해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생계는 어떻게 꾸리나?

프랑스 모원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다. 400년을 전해온 비법으로 만들어온 약술 샤르트뢰즈 리큐르 판매 수익금으로 재정 지원을 해준다. 모원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는데 우리는 그럴 인력도 없고 적당한 땅도 없다. 평수사들은 하루에 5시간씩 노동을 해야 하기에 자기 작업장에서 가구나 이콘을 만들기도 한다. 한국인 수련자들을 위해 가끔 한국 음식을 준비하는데 유럽에서 온 나이 든 수사님들이 힘들어한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단식일에는 빵만 조금 먹는데 한국 수사들이 힘들어한다.


성소자 모집은?

어떠한 홍보도 하지 않는다. 카르투시오수도회는 엄밀히 말해 ‘창설자’가 없었다. 브루노 성인의 명성을 듣고 모인 이들이 최초의 수도 공동체를 설립한 것이다. 최초의 카르투시오 회헌을 작성한 제5대 원장 귀고(Guigo)는, 지원자를 받아들이는 지침으로 “그의 앞에 전개될 어려움과 시련을 보여주라.”고 했다. 수사들과 똑같이 한 달을 생활해 보게 하고 그 다음에 입회를 결정한다.

주된 노력과 목표는 독방의 침묵과 고독에 투신하는 것이다. 독방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내심을 가지고 내 안으로 침잠하면 하느님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은둔생활이 가장 큰 매력이 된다. 한 무리의 사냥개가 토끼를 쫓다가 기진맥진해 포기하는데, 한 마리만 계속 달린다면, 왜 그럴까? 그는 토끼를 보았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글 배봉한 편집장, 사진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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