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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멈춤과 수도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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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19 ㅣ No.672

멈춤과 수도 영성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집에 머물러야 하고, 가고픈 곳으로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재택근무를 하며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특히 이런 멈춤은 청소년에게 견디기 힘듭니다. 수도원에 사는 우리는 멈춤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코로나 위기로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우리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멈춤으로 하느님께 귀 기울이기

 

멈춤과 침묵은 수도자가 하느님께 가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멈춤은 불편합니다. 멈춤 속에서 먼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바쁜 생활에 묵혀 둔 감정, 고뇌, 죄책감이 피어오릅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멈춤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자신의 삶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걱정, 자신에서 계속 도피하려는 마음에 휩싸여 공황에 빠지게 되죠. 하지만 우리가 수도자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면 이런 멈춤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초창기 수도자들도 멈춤 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 고뇌를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생각과 감정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에 책임이 있다는 게 그들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생기는 어떤 감정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 내면을 들여봐야 할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저는 제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도록 합니다. 그러면 제 안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바뀌게 되고, 내적인 평온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지금 이 순간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밝혀주시고 변화시키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멈춤과 정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에게 ‘기로바꾸스’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평생 “항상 떠돌아다니며, 한 번도 정주하지 않는”(수도 규칙 1,11) 떠돌이 수도자들입니다. 그들과 달리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에게 ‘정주(Stabilitas)’를 요구하십니다. 정주의 뜻은 여러 가지인데, 하나는 ‘항상 같은 공동체에 머문다’이고, 또 하나는 ‘같은 곳에 머문다’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이 단어는 영성적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자신에게 머무르는 것, 스스로 견디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광야 수도자가 품었던 이상을 정주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수도자는 젊은 수도승들이 자기 ‘첼라(cella)’, 곧 수도원 독방이나 암자에서 잘 지내지 못하는 위험을 알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종종 다른 이들을 돕는다는 구실로 외출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기에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대의 암자에 머무르십시오. 독방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수도승들은 특히 ‘아케디아(akedia)’의 우려가 있을 때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아케디아란 말을 제대로 번역하기 힘듭니다만, ‘태만, 냉담, 불안, 무관심, 싫증’이란 뜻입니다. 수도승이자 저술가였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45-399)는 암자에서 성경을 읽는 한 수도승을 매우 익살스럽게 묘사합니다.

 

수도승은 독서를 하다가 잠을 청합니다. 잠이 오지 않자, 일어나서 혹시 자기를 찾아오는 형제가 있는지 창밖을 봅니다. 그러고는 자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형제들이 없다고 욕합니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화를 냅니다. 아니 방이 왜 이리 좁고 축축하지? 옷이 거치적거립니다. 노동은 너무 힘들어서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기도나 하려 합니다만 지루할 뿐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조차 싫습니다. 자기 자신을 견딜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생각밖에 없습니다.

 

이 장면 묘사에서 많은 사람이 처한 상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합니다. 뭔가 계속해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늘 어떻게든 뭔가에 몰두해야 합니다. 세상사가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어딘가로 바삐 운전해가야 하죠. 그렇기에 자기 암자에 머문다는 것, 자기 자신을 견딘다는 것은 영성적으로 중요한 도전입니다. 저도 하느님께서 나 자신을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신다고 믿을 때만 겨우 성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생각을 아십니다. 표면적인 생각, 외적인 만족을 찾아 도피하려는 내면의 갈등을 아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십니다. 나 자신의 진실에서 도피하려는 시도를 포함하여 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나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진정한 자신과 만나게 되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내 영혼의 밑바탕에 있는 내면의 독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중세 수도승들은 “독방은 천국(cella est caelum)”이란 찬미가를 불렀지만, 자기 독방, 자기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사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 찬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만 진정 독방은 천국이 됩니다.

 

 

멈춤과 올바른 기준

 

코로나 대유행으로 갑자기 경제가 멈췄습니다. 우리는 항상 전진하고 더 빨라지는 것에 익숙했습니다만, 모든 사업장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우리의 기준이 더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만의 한계는 안 거죠. 세상을 맘대로 할 수 없고 우리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베네딕도 성인이 ‘탁월한 분별이 모든 미덕의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때 탁월한 분별은 두 가지 뜻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라틴어 ‘척도(mensura)’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가 측정할 때 쓰는 기준, 용량, 정도를 뜻합니다. 우리 일, 우리 소비, 특히 자화상의 올바른 척도를 말합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 다니엘 헬은 무절제한 자화상 예를 들어 매사 완벽해지려는 모습, 매사 성공하려는 모습, 모든 것을 다 쥐려는 모습은 우울증을 낳는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이런 무절제한 자화상에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코로나 대유행은 다시 우리 행동, 우리 욕구들의 올바른 척도를 가르쳐줍니다. 또한, 우리와 타인의 이미지에서도 올바른 척도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두 번째 의미는 라틴어 ‘억제하다(temperare)’에서 나왔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간(tempus)’에서 유래했습니다. 좋은 리듬은 올바른 기준에 속합니다. 수도자는 정해진 리듬에 맞춰 생활합니다. 재택근무가 불가피한 상황, 즉 늘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좋은 리듬을 타야 합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면, ‘오늘은 나의 날이었어’라는 느낌이 들지요. 본인이 하루를 만드는 겁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시기에 많은 이들은 자신이 국가의 규정과 구속에 희생되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느끼게 되면, 점점 더 약해지는 동시에, 자기 주변 세계에 공격적이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하루 일정을 잘 짜서 좋은 리듬을 타면, 희생양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됩니다. 자기 삶을 만들어나가는 거죠.

 

전례나 기도 예식도 좋은 리듬에 속합니다. 우리 수도자는 삶에 좋은 형식을 부여하는 확고한 전례가 있습니다. 전례는 신앙을 구체적으로 일상 속으로 가져가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를 축복의 자세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몸을 곧추세워서 축복의 자세를 위해 양손을 들어 올립니다. 그런 뒤 하느님의 축복이 내 양손을 통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집의 공간에 흘러드는 모습, 아니 오늘 하루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축복이 넘치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면 내가 축복받은 하루를 사는구나, 축복받은 공간에서 지내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겁니다. 아니면 저녁때 그릇 모양으로 양손을 모아서 지난 하루를 하느님께 내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좀 더 잘해야 했는데 하면서 하루를 곱씹지 마십시오. 아들이나 딸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고 해서 화를 내지 마십시오. 오롯이 하루를 하느님께 바치며, 하느님께서 오늘 있은 모든 일을 나와 내가 만난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신다고 믿으십시오.

 

전례는 거룩한 시간을 낳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거룩합니다. 그것에 대해 세상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전례에서 시간은 오롯이 하느님과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어디 내몰려 살게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겁니다. 이런 전례로 내 삶을 만든다면, 감염병 세계적 유행으로 내 삶의 활동 공간이 제약된다고 하더라도 이와 무관하게 나만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내 안에 모든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싸여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감염병 세계적 유행 상황에서 수도 영성으로 활기를 되찾으시길 빕니다. 멈춤이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어,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 새로운 경험을 만들 수 있고, 외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겁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영적 삶의 목표라고 말씀하신 ‘넓은 마음’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 안셀름 그륀 신부 - 1945년 독일 뢴 융커하우젠에서 태어나 1964년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했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상트 오틸리엔과 로마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뉘른베르크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수도원의 당가(재정 담당)로 일했다. 현재는 피정 지도와 영성 지도, 강연과 저술을 주로 하고 있다. 그는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독자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 작가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여름(Vol. 54), 안셀름 그륀 신부, 번역 차윤석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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