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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윤공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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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13 ㅣ No.664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1)


한국교회 100년과 함께 울고 웃었던 목자의 길

 

 

- 지난 2월 25일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구술 인터뷰에 답하며 웃고 있다. 사진 박원희 기자.

 

 

가톨릭신문이 창간 95주년을 맞아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기획을 선보입니다.

 

가톨릭신문은 지난 2000년 대희년, 새 세기를 시작하며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이라는 부제를 붙인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기획 연재를 3년여간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렸습니다. 한평생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들, 사목현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각자의 삶터 곳곳에서 원로 사목자로서 헌신하고 있는 이들의 삶은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남겼었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이른바 다시 태어나도 사제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곤 하셨습니다.

 

많은 독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가톨릭신문은 이 기획 연재의 시즌2를 선보입니다. 특별히 이번 기획은 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의 삶과 신앙 속으로 들어가는 장으로 구성했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목자의 길, 고단함이 더 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의 삶은 은총이고 선물이고 기쁨이라고 말하는 이들.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이라고 말하는 원로 주교들의 목소리를 구술해 담아봅니다. 그들이 풀어내는 삶과 신앙 이야기가, 우리의 영성적 빈곤을 채워주는 또 다른 거름이 되길 기대합니다.

 

- 1950년 3월 20일 윤공희 대주교(우측) 사제수품 기념사진. 광주대교구 제공.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첫 주인공은 윤공희 대주교(빅토리노·98·전 광주대교구장)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께선 광주대교구장, 수원교구장을 비롯해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은 경험도 있습니다. 3개 교구의 교구장 역할을 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1924년에 태어나셨으니 내후년이면 만 나이도 세 자리 숫자가 됩니다. 대주교님께서 직접 만나거나 모신 역대 교황님만 해도 비오 12세, 성 요한 23세, 성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성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 등 7명이나 되는데요.

 

1950년 3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사제품을 받으셨으니, 몇 년째 사제이자 주교로 살고 계시는 건지 머릿속은 산수 계산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구술을 해주실 상황이 되시는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하도’ 하신 일이 많고 겪으신 일들은 더 많기에 본격적인 구술을 받기 전 참고한 자료만도 조금 과장해서 산더미 같았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한국인 신부님보다 외국인 선교사제들이 더욱 많았던 그 시절, 어떻게 가톨릭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어떤 동기로 사제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한국사와 한국교회사 한 세기의 시간을 함께 보내신 목자. 일제침략기에 이어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과 분단, 산업의 근대화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 등의 시기를 살아오신 분. 한국가톨릭교회의 눈부신 성장의 길을 함께 이끌어오신 분.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은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윤 대주교님께선 현재 한국교회 최고령 주교님이십니다. 영육간 건강! 이것은 윤 대주교님께서 받으신 큰 선물인 듯 합니다. 기억력은 그 누구보다 좋으십니다. 그동안의 사목 여정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닐까요.

 

구술의 시작은 ‘평양냉면’이었습니다. 평소 가리는 것 없이 잘 잡수시지만, 가끔 고향 음식인 평양냉면이 생각난다며 웃으시는 모습. 그 눈웃음에서 ‘당연히 신부님이 돼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총명한 어린 소년의 미소가 묻어났습니다. 후배 사제들을 양성하고 있는 광주가톨릭대학교 내 주교관에서 생활하시는 모습에서 대주교님께서 성소를 키운 북한땅 덕원신학교 시절 모습 또한 연상됐습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 다음 주부터 시작됩니다. [가톨릭신문, 3월 27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2)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제의 삶, 후회한 적 없어

 

 

- 1939년경 덕원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윤공희 대주교(앞에서 셋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광주대교구 제공.

 

 

사제성소를 싹틔우다

 

왜 사제가 되고 싶었을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 했을까. 난 사실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참 단순한 이유였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선생님들과 수녀님들께선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에 올라갈 즈음부터 ‘신학교를 갔다 나온 네 맏형을 대신해 네가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주셨다.

 

나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진남포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한 기관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인 해성학교라는 초등학교를 나왔다. 신자들과 수녀님들이 선생님으로 계셨고, 수녀회 원장수녀님도 내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분이셨다.

 

어른들의 권유와 해성학교의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이 당연한가 보다, 사제의 길이 좋은가 보다’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예비신학생으로, 서포에 있는 예비신학생 기숙사에 들어갔다. 초가집 두 채로 만든 기숙사였다. 당시 평양교구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들 중에서 예비신학생을 모집하여 서포로 보냈다. 서포는 평양에서 한 20리가량 북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데, 거기에 평양교구청(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과 서포본당이 있었다. 메리놀회 소속으로 서포본당 주임을 맡고 계시던 노요셉 신부님이 예비 신학생 지도 신부를 겸하고 계셨다.

 

예비신학생들은 기차로 한 정거장 남쪽에 있는 평양 시내 성모보통학교에 통학하며 공부했다. 6학년 공부가 끝나면 서울 동성신학교나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학년 중에는 11명이 예비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중 네 명(이종순, 나, 장대익, 김진하)만이 신부가 됐다.

 

내가 사제의 길을 가지 않았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신부를 안 했으면 귀여운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그저 좋았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여기저기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1936년 평양 성모보통학교 6학년 예비신학생 때의 윤공희 대주교. 우측은 은사인 노요셉 신부다. 광주대교구 제공.

 

 

덕원신학교의 추억

 

덕원신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성가를 부르던 기억이 가장 먼저 난다. 내가 목소리가 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신학생 중에 두 명만 선발하던 성가대 주창자(Cantor·선창)에 뽑혀 주교님이 집전하시는 대미사 때면 삭발례를 받은 후에는 카파(전례복)를 입고 노래할 수 있었다. 카파를 입으려 제의실에 들어설 때면 그렇게 마음이 떨리곤 했다.

 

서포에서 예비신학생 과정을 거쳐 덕원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생으로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만큼 음악부 활동도 열심히 했다. 멋있어 보여서 무턱대고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결핵 등에 감염되기도 쉬운 때여서 신부님들께서 어린 학생들은 호흡기로 부는 관악기는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해주셨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음정이나 겨우 잡는 수준이었다. 오케스트라 때에 그래도 박자는 기가 막히게 맞춘다고 칭찬을 받았다. 성가 반주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풍금’(오르간) 등 이것저것 많은 악기를 다뤄 봤지만 난 악기 연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역시나 성가 선창! 매주 성가대 연습을 하며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특히 대림 시기면 불렀던 ‘Rorate caeli desuper. et nubes pluant justum’(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라는 노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종종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노래를 곧잘 부르다 보니, 흔히 듣던 대중가요도 흥얼거릴 때가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수 현인씨의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가 신학교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때 서인석 신부의 부친인 서정덕 선생께서 신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그분께 ‘신학생이 품위 없이 무슨 그런 유행가를 부르느냐’고 혼쭐이 나기도 했다.

 

덕원신학교에서 생활하던 중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평양교구 전교를 맡고 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은 일제히 미국으로 소환됐다. 때문에 교구에는 신부가 많이 부족해져서 서울 쪽에서 신부를 파견해 도와주는 곤란한 상황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교구장으로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님이 임명되셨다. 홍용호 주교님이었다. 홍 주교님께선 열성적으로 신학생 모집을 독려하셨고, 덕분에 많은 신학생들이 모집됐다. [가톨릭신문, 2022년 4월 3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3)


장차 평양교구 재건을 다짐하며 고향을 떠나오다

 

 

- 1950년 3월 20일 사제 서품식 후 윤공희 대주교가 고향 진남포 교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해방 무렵의 평양교구

 

나는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양교구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전교와 후원 등으로 겨우 꾸려지는 시기였다. 194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홍용호 주교님께서 평양교구장이 되셨다. 홍 주교님의 노력으로 신학생들도 많이 모였다. 히지만 메리놀 외방 전교회(메리놀회)의 지원 없이 신학생 양성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컸다. 교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생 양성비 모금을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 당시 교구 총대리 신부님께선 각 본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신학생 양성과 그 모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때 캠페인 표어가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였다. 큰 본당이든 작은 본당이든 각 본당의 규모와 신자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십시일반(十匙一飯) 모금을 했다. 그 결과 재정 문제는 단번에 해결이 됐다. 신학생을 귀하게 여긴 홍 주교님과 전쟁 속 힘든 시기임에도 더욱 마음을 모으고 행동한 평양교구 신자들 덕분이었다. 교구의 어려운 상황은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각성의 계기가 됐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다. 태평양 전쟁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메리놀회 신부님들은 즉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평양교구로는 돌아갈 수 없어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이북에 침입해 들어오자, 얼마 안 돼서 평양교구에서는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교구 재단법인 사무를 전담하고 평신도로서 홍용호 주교님의 비서를 맡아 교구청에서 근무하던 강창희씨가 어느 날 새벽, 평양시내 한 큰길 모퉁이에서 총살된 채로 발견됐다. 마침 주교관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소식을 듣고 장선흥 부제와 함께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총알이 가슴에서 잔등으로 뚫고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제6대 평양교구장(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평양교구 제공.

 

 

공산정권의 박해와 고난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에 의한 종교박해가 점점 심해져 갔다. 평양교구와 덕원수도원에 대한 억압도 심해졌다. 1949년 5월 7일 덕원에서 함흥교구장 겸 덕원수도원자치구장이신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독일인 신부들이 납치되고, 이어서 모든 외국인 신부와 수사들 그리고 한국 신부들까지 다 납치됐다. 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폐쇄됐다. 덕원신학교에 있던 우리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같은 날 오후에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행방불명(납치)됐다.

 

우리가 평양주교관으로 가니, 주교님이 안 계신 집에 교구 신부님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주교님이 공석이 되어 교구 책임자가 된 김필현 신부님이 신학생들에게, 각자 재간을 다해 월남을 해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면서 부제 둘(장선흥과 나)에게는 그대로 남아, 신부들이 다 잡혀가게 되면 신자들을 좀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장 부제는 빈집이 된 주교관을 지키기로 하고, 나는 고향 진남포로 내려가 조문국 본당 신부님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안타깝게도 김필현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신부님들도 하나둘 잡혀가기 시작했다. 김필현 신부님 다음으로 (그와 로마에서 동기였던) 박용옥 신부님이 교회법에 따라 교구 책임을 맡게 됐다. 박용옥 신부님은 이처럼 교구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결국은 신부들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셨다. 우리 두 부제들도 결국 다 붙잡혀가고 말 것이니, 부제 둘도 월남을 해서 신부가 되어 장차 평양교구의 재건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 낫겠다며 남쪽으로 피난하라고 하셨다.

 

 

1950년 사제서품

 

1950년 1월, 나는 지학순 신학생(후에 원주교구장 주교가 됨)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월남에 성공하였다.

 

이어 3월 20일, 나는 서울 대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월남한 신자들과 평양 출신 신우회원들이 성대히 축하해줬다. 첫 소임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중추인 명동본당의 보좌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겨우 3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신명나게 사목을 수행했다. [가톨릭신문, 2022년 4월 10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4)


죽음이 만연한 전쟁의 참혹상을 목격하다

 

 

- 1951년 뉴욕대교구 스펠만 추기경과 유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포로수용소 군종신부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며 민족의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메리놀 외방 전교회(메리놀회) 신부님들은 미군에 군종신부로 들어가게 됐고, 별다른 계급은 없이 십자가를 달고 채플린(chaplain, 군목)으로 활동했다. 그때 메리놀회 기 신부님(Hugh C. Craig)이 부산에서 포로수용소 사목을 담당했다. 메리놀회가 활발히 전교를 펼쳤던 평양교구 출신인 나는 기 신부의 보좌로 발탁돼 유엔군 소속으로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다.

 

유엔군에 채용된 군종신부는 군복도 입지 않았고, 월급도 유엔에서 ‘군속(군무원)’으로 고용된 의사와 같은 전문직 1급 수준으로 받았다. 월급 외에도 주임신부인 기 신부에게서 미사예물을 받았다. 또 필요한 물건은 미군 측에서 보급 받거나 구제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였다.

 

하지만 나는 월급날이면 늘 걱정이 많았다. 신부 복장을 하고 월급을 받는 모습을 포로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전교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이었다. 군 노무처 사무실(레이버 오피스, Labor office)에서 월급을 수령하는 데 다른 군인이나 포로들이 다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 신부님께 “군에서 주는 월급은 안 받는 게 낫겠다. 남들이 보면 신부가 전교를 하는 게 아니라 직업적으로 돈 벌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느냐. 전교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기 신부님은 “자네가 그걸 안 받으면 내가 그 월급을 따로 줘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 전교에 쓸 돈이 그만큼 부족해지는 것이다”라고 답해 나는 월급을 계속 받게 됐다.

 

1951년 4월 부산 포로수용소의 중공군과 인민군 포로. 출처 미국 국방부.

 

 

전쟁 속 일상

 

포로수용소 군종신부에게 정해진 일과로 ‘정신훈화시간’이 있었다. 특별한 강론이나 전교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훈화라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주임 군종신부인 기 신부에게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냐’며 도움을 청했지만, 기 신부는 ‘그저 정신적으로 훈화를 하라’며 미국 군목들이 보는 영어로 된 참고 강론집을 줬다. 그러나 그건 열심히 읽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6·25전쟁이 한창 격해지면서 갑자기 수만 명의 포로들이 생겨서 부산시 외곽에 가시철망을 둘러친 포로수용소가 여러 군데 생겼다. 기 신부님이 수용소를 관리하는 유엔군 측에 미리 연락하여 정한 날, 정한 시간에 수용소를 방문하면 수천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철책이 둘러쳐진 한 구역(compound)에 집합했다.

 

처음으로 맞이한 훈화시간, 단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딱히 이렇다 할 만큼 강조할 주제도 없고 해서 5분 남짓 이것저것 얘기하다 적당히 끝맺었다. 그리고 군종신부가 정한 천막에서 미사를 드리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참례하고, 비신자들이라도 교리를 배워보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오라는 말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시원찮게 훈화를 끝내고 기 신부와 함께 거처로 돌아오는데, 기 신부가 대뜸 내게 “오가는 데 쓰는 휘발유가 아깝다”며 면박을 줬다. 지금 돌아봐도 너털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개인적으로 포로수용소의 일상에서 겪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현실은 참으로 달랐다.

 

수시로 전황이 뒤바뀌며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 중에는 중공군이나 북한 인민군뿐 아니라 서울에서 징집병으로 끌려온 포로들도 있었다. 매일 포로수용소 내 병원 텐트를 방문하면 환자들은 군용 해먹에 축 늘어져 누워있었다. 특히 중환자 텐트에는 이질과 결핵 환자들이 많았다. 임종이 임박한 이들을 찾아 준비가 되면 대세를 줬다. 그러나 지난주에 봤던 환자가 다음 주에 방문하면 이미 사망하고 없어 침상이 비워져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죽음이 만연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 내에서 분란도 크게 발생했었다. 부산에서 옮겨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 간에 이념 갈등이 생겨 수용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야단이 났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포로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에게 붙잡혀 포로 아닌 포로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중에 소장이 바뀌고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내가 느꼈던 전쟁의 참상은 포로수용소에서의 작은 경험 정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이 됐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올 때면 그리운 가족들이 많이 생각난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피난민들이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죽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전쟁은 이토록 참혹한 일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2년 4월 17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5)


교회 쇄신 향한 변화의 바람 한가운데 서다

 

 

-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윤공희 대주교(맨 왼쪽)를 비롯한 한국주교단 일행.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첫 회기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첫 회기에 참석하게 된 것은 참 운이 좋은 일이었다. 이후에는 지원 제도가 없어졌지만, 당시엔 전교 지방의 주교들이 각자 비서를 2명까지 공의회에 동반할 수 있었고, 그 비용도 교황청에서 다 지원해 줬다.

 

한국주교단은 특별히 외국에 가본 경험이 없는 신부를 택해서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려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때 나는 로마 유학을 다녀와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협의회 총재 주교님은 메리놀회 출신인 청주교구장 파 주교님(James V. Pardy)이었다. 파 주교님께선 누구를 데려갈까 고민하시다가 메리놀회가 북한 평양교구에서 활동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평신도 사무장 로마노씨와 나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공의회 첫 회기 일정 중에는 주교님들 외에 수행원들이 옵서버로 공의회에 참석할 시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회기 내내 파 주교님 혼자 오전엔 공의회에 참석하시고, 오후엔 내가 모시고 로마 시내로 나가는 일정이 이어졌다. 내가 로마 유학 경험이 있었던 터라 로마 안내를 맡게 된 것이었다.

 

첫 회기 동안 13개의 의안을 토의했지만 회기가 끝날 때까지 준비와 토론만 이어지고 결정된 내용은 적었다. 그런데 전례에 대한 안건, 그것 하나만은 의결이 됐다. 이를 통해 미사를 비롯한 전례 시간에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특별히 강조했던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었다. 이때 교회 내에서 펼칠 평신도 역할에 대해 논의했던 내용은 추후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만들어지는 기틀이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두 번째 공의회 참석

 

1964년 제2회기는 수원교구장이 된 후에 열려, 나도 주교로서 공의회에 참석하게 됐다. 수원교구장 임명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기억들이 많지만, 다음 회로 다루겠다.

 

처음 공의회 총회에 들어가니 주교들이 라틴어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땐 종교 자유에 관한 의안을 두고 토론이 한창이었는데, 각 국가와 지역마다 라틴어 발음이 미묘하게 차이 났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미국에서 오신 유명한 추기경이 두 분 계셨다.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Francis Joseph Spellman)과 보스턴대교구의 쿠싱 추기경(Richard James Cusing)이었다. 라틴어로 토론이 오가는 와중에 이 분이 Liberatus(자유)를 영어식으로 크게 소리 내어 좌중이 웃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세간에선 미국 주교단에 대해, ‘공의회 내용도 잘 모르고 그저 참석해서 손만 들 것이다’고 비평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실제로 공의회에 참석한 각국 주교단 중에는 다른 주교가 발언할 때 집중하지 않거나 별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만 참여하는 나 같은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분위기를 주도한 유명한 추기경이 한 분 계셨다. 바로 독일의 베아 추기경(Augustin Bea)이었다. 그분은 예수회 출신의 성서학자로 아주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리더 중 한 분이었다. 베아 추기경과 관련해선 또 한 가지 일화가 기억난다. 공의회가 한창일 때 로마 공항에 내리면 국가별로 항공사 광고가 훤하게 보였는데, 그중에 영국 항공사 베아(B.E.A-British European Airways) 즉 ‘영국유럽항공’의 광고판도 크게 붙어 있었다. ‘Fly BEA’, ‘베아에 타라’고 광고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걸 본 주교 중 누군가가 ‘우리도 베아에 올라타면 된다. 베아 추기경이 얘기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고 농담을 해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가톨릭신문(당시 가톨릭시보)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공의회 관련 정보를 얻을 길은 가톨릭신문밖에 없었다. 때마침 독일에서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수환 추기경님이 사장으로 계셨는데, 공의회에 대해 열심히 소개했다. 김 추기경님이 얼마나 열성을 가지고 임했는지, 나중에 얘기하길 ‘밥 먹는 시간도 그렇게 아까웠다’고 하더라. 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유일한 교계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은 전례 개혁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알리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가톨릭신문, 2022년 4월 24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6)


해마다 세계 곳곳 다니며 한국교회 위한 도움 호소

 

 

-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참석을 위해 출국하는 한국주교단.(왼쪽부터 지학순 주교, 윤공희 주교, 최재선 주교,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 한공렬 주교, 황민성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주교 임명과 서품식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윤공희 신부를 로마로 불렀다.’

 

주한교황대사관에서 외무부에 보낸 외교공문은 간단했다. 딱 한 줄이었다. 부리나케 출국하기 위해 외무부에 여권을 신청하러 갔는데, 이미 공문이 와 있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때는 1963년 10월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부총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황대사관에서 차량이 왔다. 그 차로 대사관에 갔더니, 교황대사가 내가 신설 수원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은 10월 9일 한글날이었는데, 주교서품식은 10월 20일 전교주일에 맞춰 로마에서 거행된다고 했다. 열흘 남짓 남은 시간 동안 출국 준비를 한다는 건 그 당시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든든한 뒷배 덕분이었을까? 이틀 만에 여권을 받아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2회기(1963년 9월 29일~12월 4일)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한국주교단은 로마에 가 있었다. 여권을 발급받기가 참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로마에 계신 주교님들은 다들 ‘윤 주교님이 일정에 맞춰 오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다고 한다.

 

로마에 도착해서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통상 거쳐야 할 주교 서임 전 1주일간의 피정도 생략해야 했다. 교황청에서는 당장 주교 복장부터 맞춰야 한다며 독촉했고, 부랴부랴 주문한 자주색 수단이 다행히도 이틀인가 사흘 만에 완성됐다. 그런데 아뿔사! 주교 버선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너무 커서 접고 또 접어 신어야 했다. 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서품식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흘러갔다.

 

1963년 10월 20일 주교 서품식 직전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는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해외 원조 모금과 최재선 주교

 

수원교구장으로 부임하고 처음 교구를 꾸리면서 외적으로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개의 본당, 24명의 사제, 이들 중 2명은 유학 등의 사유로 부재중이기도 했다. 신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재정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교구장 착좌 때 받은 축하예물이 수원교구의 첫 수입이었다.

 

교구장으로서 첫 과제를 인력 문제 해결, 즉 신학생 양성이라 생각하고 이에 주력했다. 교구민들에게 성소 개발을 간절히 호소했고, 신학생이 증가하면서 인력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하지만 재정은 여전히 큰 문제였다.

 

그 시절은 해외 원조와 모금을 통해서 전교를 하던 때였다. 나도 해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모금을 했다. 로마 유학 때 인연을 맺은 외국의 신부들에게 해외 지역 교구나 본당에서 모금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해엔 독일, 어떤 해엔 미국으로 갔다. 당시 주교들에게는 이런 모금 활동이 큰 고민이었다. 광주대교구의 현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대주교님 같은 외국 주교님은 해외에서 원조를 많이 받아 오기도 하셨다.

 

한국인 주교님 중에서 특히 모금을 잘하셨던 분이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님이다. 최 주교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중에도 주변에 도움을 청할 만한 외국 주교가 어디 있을까 하면서 살펴보기 바빴다. 다른 나라 주교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 기막힌 방안도 마련했다. 공의회 기간 동안 매일 오전 총회가 시작되기 직전 참가 주교들은 모두 기념사진을 찍게 된다. 최 주교님은 이 기념사진을 구해, 그날 자신의 옆자리에서 사진을 함께 찍은 독일 주교님에게 사진을 선물하면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침 그 주교님께선 전교 지방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총회가 없는 주일이면 그 주교님께선 전교 지역에서 온 주교들을 자신이 맡고 있는 독일의 교구 본당으로 보내 모금을 하도록 해주셨다.

 

또 한 분, 한국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슈왈츠(소 알로이시오, Aloysius Schwartz) 신부님도 모금하는 면에서는 유명한 분이었다. 슈왈츠 신부님은 당시 부산에서 사목하시면서 원조를 청하는 편지를 미국 전역으로 수천, 수만 통씩 굉장히 많이 보냈었다. 미국 전역에 그런데 편지를 받는 이들은 특별히 주교 서명이 직접 날인된 편지를 좋아했다. 최재선 주교님은 슈왈츠 신부님이 보내는 그 많은 편지에 서명을 하고, 심지어 고등학생 몇 명을 아르바이트로 구해 최 주교님의 친필 사인을 본뜨도록 배우게 해서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보니 몇몇 미국 주교들은 공의회 중에 한국 주교를 만나면 ‘도대체 한국의 비숍 초이(Bishop Choi, 최 주교)가 누구냐’고 수소문하기도 했다. 심지어 도움 호소 편지를 취급했던 부산 우체국장은 엄청난 해외우편 실적 덕분에 승진까지 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들도 종종 있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1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7)


처참한 광경 앞에서 느낀 무력감, 마음의 빚이 되다

 

 

- 1984년 5월 4일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한 윤공희 대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금남로

 

수원교구장으로 10년을 보내고 1973년 10월, 나는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했다. 그렇게 시작된 광주에서의 삶은 내 개인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게 1980년 5월 19일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해 5월 18일, 광주의 상황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급박하고 심각했다. 하루가 지난 19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광주 시내 금남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 6층이 교구청 집무실이었다. 그날 금남로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청년들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길바닥에 엎드려 놓고 몽둥이로 때리거나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금남로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창문마다 사람들이 모여 대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이 야속하게도 내 집무실에서도 훤히 보였다.

 

군인들이 험악하게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는 그 혼란 속에서, 가톨릭센터 건물 모퉁이 골목 사이로 몽둥이를 든 군인 둘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40년이 넘도록 각인된 그의 모습, 한 마디로 처참했다.

 

겉옷은 이미 벗겨졌고 몸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인 모습이 드러났다. 하얀 와이셔츠에는 빨간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 저 사람은 어서 응급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차마 내려갈 수 없었다. 내려가면 그 군인들이 나도 마구잡이로 때릴 것만 같았다. 순간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그 강도 맞은 사람을 비켜서 지나가는 사제가 바로 나로구나’ 그런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98년 2월 26일 5·18민중항쟁추모탑에 목례하는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5·18 그 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처음엔 전남도청에서 정시채 부지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더니 신부들을 비롯해 각계각층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지금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대체 여기서 뭣 하고 있느냐’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이 와중에 부지사는 내게 주석(主席), 위원장의 자리를 자꾸 권하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한사코 사양하고 동석했던 조철현(비오) 신부에게 천주교 대표를 일임하고 어수선한 자리를 나왔다.

 

이후 계엄군의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강경진압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파면된 윤흥정 장군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었다. 소 장군은 수습위원들이 내세운 조건들에 대해서 나와 함께 얘기했는데, 그에게 전달한 나의 주장은 분명했다. ‘이 일을 수습하려면 군인들의 만행을 인정해야 한다. 그걸 전제하고서 상황을 봐야지 다른 방법은 없다. 군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고 상황을 수습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광주 방문

 

나는 사제품을 받을 때 사목표어를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정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새로 표어를 정할 수 있다고 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평화에 대한 갈망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던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방한하신 것이다.

 

1984년 5월 4일, 그분의 방한 첫 공식 일정이 광주 방문이었다. 그해 5월만큼은 광주에도 슬픔과 아픔보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님을 뵙고 5·18에 대해서 짧게나마 얘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 그 비극이 벌어졌던 금남로에서 카퍼레이드 해주신 것이다.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금남로 양편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평화의 사도를 환영했다.

 

그때 교황님을 태운 ‘포프 모빌’에 동승했던 나에게 한 외국 추기경이 ‘아니 대한민국이 마치 가톨릭국가인 것처럼 보이네!’하며 감탄하는 말을 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였으니 그런 기분 좋은 오해를 할 법도 했다. 이때가 내가 광주대교구장으로 봉직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8일, 정리 남재성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 (8 · 끝)


어려운 순간마다 협조자를 통해 이끌어주신 하느님

 

 

- 1984년 5월 4일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성인입교예식미사 집전을 위해 제단으로 향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교황 방한의 뒷이야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할 때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있다. 전임 춘천교구장이셨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님이다. 그때 로마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장 주교님은 교황님의 해외 순방 업무를 총괄하던 바티칸 방송국장 신부와 함께 교황님의 방한 계획과 일정을 논의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정부는 적극적으로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후원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신군부 정권에 대해 말들이 많았던 시기였던 만큼, 정부는 교황 방한을 일종의 이미지 개선의 기회로 여겼다. 얼마나 적극적이었던지 교황님 경호팀을 청와대에서 직접 꾸려서 준비할 정도였다.

 

교황님의 방한에 앞서 이 업무를 담당한 바티칸 방송국장 신부가 먼저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님의 일정을 사전에 똑같이 따라가면서 교통편이나 세부 일정에 대한 답사와 보완을 하기 위해서였다. 청와대 경호팀과도 이견을 조율할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금남로’였다.

 

교황님께서는 광주공항에서 출발, 금남로를 통과하면서 카퍼레이드를 진행하고 광주무등경기장으로 이동해 미사를 봉헌하도록 동선을 짰다. 이를 알게 된 정부 관계자들이 금남로 카퍼레이드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담당 신부는 카퍼레이드를 막는다면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교황님께서는 무사히 금남로를 지나가실 수 있었다.

 

1984년 5월 4일, 교황님은 광주무등경기장에서 미사를 주례하시면서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도 주셨다. 이날 강론 때 교황님은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를 용서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꼭 해야 하는데 참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로 용서를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셨다.

 

나중에 이를 들은 광주시민들은 ‘사건의 책임자들이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광주대교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많은 일을 해 왔지만, 그중에 큰 숙제가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알리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내 후임 최창무(안드레아) 대주교님은 그 노력을 이어받아 교구 차원에서 남동성당을 5·18기념성당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나도 5월이면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에게 5·18과 관련된 강론을 했다. 강론의 요지는 이렇다.

 

5·18이라는 큰 역사적 시련을 우리가 항상 되새겨야 한다. 과오를 기억하지 못하면 또 다시 잘못을 거듭할 수 있다. 독일은 유다인 학살과 같은 과오를 계속 인정하고 사죄를 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자신들이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되새기고 있다. 우리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과 의미를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내려놓는 화해와 화합의 정신도 필요하다.

 

구순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나는 ‘광주와 5·18’에 관해 수없이 질문을 받았다. 이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지금껏 해왔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어떤 목적이라도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오늘날에는 5·18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 이로 인해 분열되고 갈라서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진실이 알려지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분열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화합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큰 과제일 것이다.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 원로 주교로 내가 무언가 할 일이 더 있는가. 2001년 가톨릭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청하면서 그런 질문을 했다. 무언가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어, 일본어, 라틴어를 조금 할 수 있으니 그저 ‘책 몇 권 정도 번역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를 좀 배워두면 글 몇 자 좀 빠르게 적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모니터 화면만 보면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파서 포기했다. 2022년에 이르기까지 결국 번역한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나마 최근 평양교구에 관한 기억을 구술로 정리한 책이 나와서 참 다행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당신의 도움을 주변 사람을 통해 보내주셨다. 아무것도 없는 신설 수원교구의 교구민들이 보여준 열성과 해외 원조의 손길들. 교구청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던 서울대교구장 서리 시절. 흔쾌히 도움을 주셨던 이웃 교구와 수도회의 장상들. 이 땅에 역사에 남을 상처가 생기자 ‘평화의 사도’이신 교황님을 보내 주셨던 것. 이렇게 쓰인 내 얘기에 관심 가져 지켜봐 주시고 또 항상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끄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15일, 정리 남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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