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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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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희망의 표시인 성모 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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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7 ㅣ No.246

희망의 표시인 성모 승천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는 교황헌장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성모 승천’을 ‘신앙교의’로 선포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권위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권위로써, 원죄의 물듦이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께서 당선의 지상 생애가 마쳐졌을 때 육신과 영혼으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졌다는 것을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교의로 선언하고 규정하는 바이다.”

 

이 신앙교의의 내용을 보면 성모 승천이 마리아 그분 자신의 신원에 합당한 것이자 이전에 선포했던 교의들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께서 1) 평생 동정녀이시고 2)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3)원죄없으신 분이시라는 기존의 신앙교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또 그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리아 관련 신앙교의들의 역사성

 

마리아께 대한 신심의 역사는 아주 깊다. 특히 그분의 ‘동정성’에 대한 공경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록된 글 가운데 가장 먼저 것으로는 이냐시오 교부의 편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마 1-2세기에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신자들의 각별한 공경심이 있었음을 밝혀주었다. 호교 교부 유스티노도 같은 면에 대해서 ‘트리폰과의 대화’ 중에 소개한 바 있다. 그 이후의 자료로 리옹의 이레네오의 논문들을 들 수 있다(반이단론).

 

이렇게 3세기에 이르는 동안 줄곧 이어져오던 마리아께 대한 공경심, 특히 그분의 동정성에 대한 공경심은 신자들의 신심행위로 표현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실제로 새로 입교하는 이들이 고백해야 하는 신앙의 내용 가운데 한 가지가 그분의 ‘동정성’에 관한 것이었음을 당시의 ‘세례 신앙 고백문들’ 안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암브로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해서, 5세기에는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한 공경심이 소개되었다.

 

한편 4세기 초부터는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품위가 공경의 대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 마리아를 단지 ‘그리스도의 어머니’ 정도로만 공경하자고 했던 네스토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이 등장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의 주장에 힘입어 에페소 공의회(431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확인하고 신앙 고백의 내용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성모 마리아의 ‘성성’과 ‘무죄성’에 대한 공경심은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서방교회 지역에 알려졌고 얼마 뒤에는 동방교회 지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라테란 공의회(649년)에서부터 언급되어 오던 이 점은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신앙교의’로 확정되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회가 ‘신앙교의’로 선언한 사실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1858년 3월 25일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께서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이”라고 소개한 사건은 그래서 더 유명해졌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그에 대한 공경은 약간 뒤늦게 6세기 초부터 소개되기 시작했다. 비록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생애가 하느님의 계획으로 예외적이었던 것처럼 마침도 예외적이어야 한다고 교회 초창기부터 믿었기에 당연히 육체적인 승천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은 지역 교회들 안에서 성모 승천이 경축되어 오면서도 논란이 있었으나 급기야 ‘성모 승천’도 신앙교의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성모 승천 교의의 선언 과정

 

비오 9세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선언하자마자 로마에는 육체적인 승천도 교의로 규정하고 선언해야 한다는 요청들이 쇄도했다. 그러자 비오 12세는 1946년에 세계의 모든 주교들에게, 동정녀의 육체적 승천이 신앙교의로 제안되고 규정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였고 호의적인 답변을 얻어 이를 신앙교의로 선언하였다.

 

비오 12세는 1954년에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언 100주년을 경축하면서 회칙 “Fulgens Corona”를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교리적 가르침 특히 승천이 피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공로와 섭리라는 논리구조상 무염 잉태의 결과라는 가르침을 폈다. 같은 맥락에서,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았고 공의회의 표현대로 해산 전에도, 해산 중에도, 해산 후에도 동정녀인 채로였다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과 또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정도를 말해준다. 또한 그 일치의 정도가 비록 성서의 증언은 없으나 그분의 육신적인 변형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그분의 전 존재를 관통하는 하느님과의 사랑을 밝혀주는 것이기에, 그분이 하늘에서 누리는 지위는 당연히 ‘하늘의 여왕’에 걸맞는 것임을 1954년 10월 11일의 교황헌장 “Ad Caeli Reginam”을 통해서 말했다.

 

 

성모 승천 교의 선포의 의의

 

먼저, 교회가 자신의 실존 곧 철저하게 성령께만 의존하는 교회로서의 자신에 대해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교회는 신학적 사변이나 단순한 인간적 지혜와 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늘 함께 있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계시를 날로 새로이 이해하도록 인도해 주시며 그르침이 없으시기에 성모 승천을 신앙교의로 선포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모 마리아를 통한 교회 공동체의 미래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교회는 마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으며,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결과이자 결실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성취한 상태에로 들어갔음을 미리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과 마리아의 불가분한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분에 대해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 자신의 미래를 그분을 통해서 표현하는 일이었다.

 

세 번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들의 운명을 앞서 표현했다는 점이다. 성모 승천을 신앙교의로 선언했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을 때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충만함을 나누고 계신다. 마리아가 지금 즐기시는 영광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궁극적으로 즐기고자 희망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승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육신 부활에 선참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운명을 앞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성모 승천 안에서 교회의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승천이 신앙교의로 선언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일치에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으나 개신교 심리학자인 칼 융 같은 이들은 이 선언이야말로 근자 4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마리아를 현양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여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어쨌든 성모 승천 교의는 아들 성자의 영광과 어머니 마리아의 현양,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 것처럼 이 지상에서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2베드 3,10)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로서 빛나고 계신다”(교회헌장, 68항).

 

* 리순성 베드로 - 신부 · 광주 가톨릭 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리순성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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