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무관심의 극복과 연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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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6 ㅣ No.1292

[복음살이] 무관심의 극복과 연대성


 

지난 해 12월 인천에서 11살 소녀가 2년 동안 집에 감금당한 채 아버지와 동거녀 등에게 폭행을 당하다 탈출한 것이 알려져 국민적 공분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올해 1월 부천에서 초등학생 최모 군이(2012년 당시 7세)이 부모의 상습폭행을 받다가 집안에서 수년 간 냉동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 역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아이들이 학교를 장기 결석해 주위에서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지자체와 교육청, 경찰, 아동보호전문기관 등 사회안전망과 아동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소녀가 살던 인천시 연수구의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사건 발생 8개월 전에 운영상 문제로 폐쇄된 상태였습니다. 언론에서는 만일 이 기관이 계속 지역의 아동학대 사건을 추적했다면 소녀가 학대로 고통 받던 시간을 줄여 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2015년 기준 인천지역 0∼12세 아동인구는 35만2087명인데 아동보호기관은 고작 3개(인천시·북부·남부)뿐입니다. 학대 신고 건수가 2013년 700여 건, 2014년 1천여 건, 2015년 910여 건인데 반해 1개 기관 당 직원은 12명뿐이라고 합니다.(2016. 1.20. 오마이뉴스)

우리나라 전체로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경찰의 통보를 받고 학대아동 보호·치료 업무를 실제로 진행하는 전국의 아동보호 전문기관은 현재 55곳이며, 이곳에서 피해 아동을 가해자로부터 격리해 비밀리에 보호하는 학대피해아동쉼터 37곳을 운영하는데 정원이 각 7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수용인원이 약 250명밖에 안 되는 셈입니다.

2014년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아동 학대 사례가 1만 명이 넘고 14명이 사망했음에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와 관심은 너무 부족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동학대를 막기 위한 제도적인 미비함 뿐 아니라 관련된 공무원과 학교 선생님들, 주변 이웃 어른들의 무관심도 이런 비극에 한 몫을 더했습니다. 부천 초등학생의 경우 사망 전에 있었던 장기 결석 원인은 ‘학교 폭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경기도 교육청에 따르면 숨진 초등학생이 2012년 부천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초기부터 정서 불안 증세를 보였고, 같은 반 친구를 때려 ‘'학교폭력 피해자 신고’가 접수되었지만 최군의 어머니는 이때부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학교 측에서 오는 전화나 문자 등에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교 관계자는 “당시 어머니의 심리상태를 봤을 때 최군의 안전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면서 “학교 측에서 조금 더 세심하게 최군의 상황을 끝까지 살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라고 인정했습니다.(2016.1.16. 노컷뉴스)

2013년 10월 울산에서 의붓어머니의 상습적인 매질에 숨진 8살 이모 양의 경우도 유치원 교사가 가정 학대를 의심해서 신고했지만, 거듭된 이사와 초등학교 진학을 거치는 동안 이모 양의 ‘학대 사례’는 종이 보고서 형태로만 전달되면서 담당자들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지 못했고, 더구나 중간에 종결 처리됨으로써, “골절상과 화상을 진단한 의사도, 몇 차례나 흉터를 목격한 교사도 의심을 품지 않는 사이” 결국 아이는 숨지고 말았습니다.(2016.1.20. 한겨레)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처럼 주위의 약한 생명에 대한 폭력과 무관심으로 초래된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면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학대로 고통당하거나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바오로2세 교황은 카인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형제자매들을 위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오늘의 경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지닌 증후에는 노인, 병약자, 이민, 어린이 등 사회의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연대 의식의 결여, 그리고 생존, 자유, 평화 같은 기본적 가치들이 관련되어 있는 세계 민족들 사이의 관계에서조차 흔히 발견되는 무관심이 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질문에 대해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며 자신의 책임을 거부합니다. 이런 카인의 대답은 오늘날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채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모른다’는 카인의 거짓말은 이웃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량 생산과 소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생활양식이 자연 환경의 파괴와 생태 위기에 일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지구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며 그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자비는 인간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 힘차게 고동치는 “하느님의 심장”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십시오”라는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담화문에서 교황은 무관심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무관심의 세계화”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면서도 막연한 생각만을 지니며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 연민을 느끼거나 아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안일만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런 무관심은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이고 공적인 영역에 대한 무관심으로 확대되고 이는 냉담과 무기력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태도는 이웃의 “존엄과 기본권과 자유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고 “이윤 추구와 쾌락의 문화와 결합되면”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교황은 교회가 ‘자비의 해’를 지내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와 자비의 문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비는 인간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 힘차게 고동치는 “하느님의 심장”이며, 연대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부인할 수 없는 상호의존을 인식하는 데 가장 적합한 도덕적 사회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교황은 이를 촉진하기 위해 우선 가정이 공동체적 나눔, 배려와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배우고 전달하는 첫 자리가 되어야 하며, 학교와 여러 청소년 기관의 교육자들은 이기주의라는 시류를 거슬러 “자유, 상호존중, 연대의 가치”가 어린 시절부터 잘 전달되게 할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합니다.

자비의 희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주위를 더 잘 살피며 이웃에 학대받는 아동을 포함하여 자신의 기본권과 존엄을 훼손당하는 이들은 없는지, 또 나의 도움과 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는지를 찾아보고 그들에 대한 무관심을 적극적인 관심과 투신의 태도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사랑의 열매”(사목헌장 78항)이며 “연대의 열매”(사회적 관심 39항)입니다. 연대성은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사회적 관심 38항)을 뜻합니다. 더불어 살며 서로 돕는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고 공동선에 투신하고자 하는 이러한 연대성의 정신으로 우리 사회의 참된 평화를 이루어가기를 희망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3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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