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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26-27: 일상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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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15 ㅣ No.776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26) 일상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상) 너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너와 내가 함께할 때 가능하다

 

 

인간 공동체의 비극

 

시노드 교회 만들기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시노드 교회 혹은 함께 가는 길이 일종의 교회 운동이 된 데에는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지금 시노드 교회 운동의 배경은 동일하다.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에 일정 부분 교회가 적응하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회의 사명을 발견하고 수행하기 위해서다. 현대사회의 변화된 모습과 교회의 문화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빛은 자연스레 소멸해 갈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래서 시노드 교회 운동은 일념통천의 자세로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러면 현대사회의 다양한 변화와 양상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특이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개념어들로 표현된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 수없이 많은 개념이 우리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사회의 특성을 표현하는 이러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가치는 개인과 자유이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중요시되고, 개성이나 특이한 개인의 성향이 예전처럼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 인정투쟁을 할 필요성이 약화돼 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과 교회의 공동체적 가치 혹은 전통 규범 사이의 충돌은 교회가 세상을 향한 복음화의 길에 있어 상당히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과 밖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수렴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가치들을 보존하고 구현할 수 있는가가 시노드 교회의 성패를 가름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다양한 개인들과 개별 조직의 욕망과 이익들이 한 공동체를 이룰 때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국제 공동체에서도 전쟁과 테러리즘이 발생하고, 개인 내지 작은 집단들 안에서도 갈등과 부조화가 발생한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 특성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개인의 생각과 가치가 존중되고, 동시에 다양성이 인정된다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이상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거미줄의 교훈

 

이러한 비극과 관련하여 아키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라는 일본 작가가 쓴 「거미줄」이라는 짤막한 우화는 우리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 사이의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픈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산책하는데, 연꽃이 가득한 정원 연못 밑 저 아래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는 다양한 죄인들이 어두운 심연에서 피범벅이 된 채 고통스러워하는 지옥이었다. 그중 칸다타란 인물이 눈에 띄었는데, 그는 과거에 도적이어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악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딱 한 가지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숲속을 지나다가 발밑에 작은 거미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순간 그는 거미를 밝으려다 생각하였다. “아니지, 아니야 비록 작지만 이것도 생명이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겠다.” 부처님은 그의 과거 모습을 보시며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를 지옥에서 꺼내주기로 결심하였다.

 

부처님이 사방을 둘러보니 반갑게도 연꽃잎 사이에서 거미 한 마리가 은빛 실을 뽑아내고 있었다. “옳거니, 저 거미줄로 칸다타를 구해 주어야겠구나”하고 부처님은 손뼉을 쳤다. 하루는 칸다타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하늘로부터 은빛 찬란한 거미줄 한 가닥이 가냘프게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칸다타는 “옳거니, 저 줄을 잡고 올라가면 지옥 밖으로 탈출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기쁨에 들떠 말하였다. 혼자 이렇게 생각하곤 두 손으로 거미줄을 움켜잡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가다 거미줄에 매달려 쉬면서 미소를 띠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시무시한 지옥의 심연이 까마득히 아래에 보이자, 그는 “되었어, 이젠 되었구나!”라며 들뜬 그의 마음을 표출하였다.

 

그런데 발밑으로 자세히 아래를 보니 수없이 많은 죄인이 거미줄 끝에 매달려 마치 개미 떼처럼 죽자 살자 기어오르고 있었다. 칸다타는 한참을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 “이 약한 거미줄은 나 혼자 몸으로도 끊어질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냐!” 칸다타는 있는 힘껏 아래로 외쳤다. “야, 이놈들아! 이 죄인들아! 이 거미줄은 내 것이야! 누가 너희들보고 맘대로 이 줄을 잡으라고 했어? 내려가! 내려가란 말이야!” 바로 그 순간, 그때까지만 해도 끄떡없던 거미줄이 칸다타가 매달려 있던 바로 그 부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렸다. 칸다타는 순식간에 지옥 암흑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부처님은 하늘 위 극락 연못가에서 이것을 모두 보고 계셨고, 칸다타가 지옥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는 몹시 슬퍼하였다.

 

 

구원은 너와 내가 함께 걷는 길을 통해서

 

칸다타의 교훈에서 ‘함께 가는 교회의 길’이 일반적인 목적과 방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구원론적인 속성을 담지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교회라는 이름 안으로 수많은 특이성을 갖는 개인들이 함몰될 수 있기에, 교회는 이번 시노드를 통해 모든 교회 성원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여기에 준거하여 경청하면서 교회 생활과 사명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을 논의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신자 개인들의 생각은 어떻게 합의에 이를 수 있을까? 교도권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각자의 경험, 생각, 신앙 전통의 숙지 정도가 차이 남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과 사명의 길은 신앙 전통에 준거한 신자들의 살아있는 신앙에 대한 상호 간의 확인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 또한 교도권은 교회 전통의 보고를 신자들과 나눔으로써 우리 신앙의 사도적 정통성이 무엇인지를 신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크고 작은 교회 내 공동체들이 성령의 뜻에 부합하는 식별과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길은 나 혼자 그리고 소수의 교회 그룹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녕, 평화 그리고 구원의 빛을 추구하지만, 나 혼자 할 수 있고, 나 혼자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칸다타처럼 암흑 속으로 떨어진다. 시노드 교회의 핵심은 다양한 의견들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바로 내 구원의 길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로 인식하는 데 있다. 시노달리타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 바로 너와 내가 함께할 때 가능한 것임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예언자적 목소리(복음화)를 세상에 던져줄 수 있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목표가 다양한 개개의 욕망을 절충하고 타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과 다른 타자의 세계와의 만남 안에서 나의 완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통찰을 던져 주었으면 좋겠다. [가톨릭신문, 2023년 11월 12일, 최영균 시몬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27) 일상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하) 시노달리타스는 평화가 아니라 칼!


나와 너 사이에 성령께서 개입하도록 함께 인내하는 것이 중요

 

 

-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교시노드에 대해 “공동합의성은 성령을 지닌 교회의 여정”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2017년 4월 미국 캔자스주 위치타에 있는 무염시태 성당에서 거행된 성유 축성 미사. CNS 자료사진

 

 

과거 미국 민간인들이 국제평화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들어와 의료, 교육, 농업 등의 분야에서 애쓴 적이 있었다. 이분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십 수 년간 한국을 위해 살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갔는데, 얼마 전 한국 정부에서 이들을 초청하는 행사에 나 역시 초대되어 갔다. 당시 원탁에 앉아 식사하는 중, 누군가 대뜸 신부 옷을 입은 나에게 미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한국은 어떠냐고 물었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사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올해 우리 연구소에 방문했던 체코의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나 미국의 스티브 베반스 신부님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과 미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시노달리타스 교회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는 예수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시노드 교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교회의 영적 체질을 개선하여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한 모든 개혁과 쇄신에는 자기파괴의 과정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극도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 가치관에 의문을 일으키며, 이제껏 익숙하게 생활해 왔고 때로는 누려왔던 권리와 관행의 변화가 요구되었을 때, 반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노드 교회를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전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역시 인간 세상 안에 있기에 새로운 발전과 혁신을 도모하려는 사람과 익숙한 과거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 사이의 줄다리기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변증법적 투쟁은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이 아니다

 

개혁이든 쇄신이든 그것을 추진하는 그룹이 있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타협도 필요하다. 이는 교회 안 공의회의 전후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근대의 개혁 공의회였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전에 자연발생적인 교회쇄신 운동과 비전을 공유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물론 그 반대 세력들도 있었다. 20세기 중반에는 이러한 그룹 너머에 트리엔트공의회로 각인된 교회에 더 익숙한 사람들 또한 훨씬 많았다. 그래서 공의회 회기 중에도 공의회를 방해하는 복고주의자들도 있었고, 공의회가 끝나고도 그 가르침이 모든 곳에 잘 정착되지도 못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복고주의에서 발생하는 아이디어와 행동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의회가 뿌리를 내리는 데 100년이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40년이 남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공의회의 연장선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효율적이고 심도있는 교회쇄신을 추구하는 시노달리타스 교회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시노달리타스 교회쇄신을 위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으며 이 전쟁 같은 타협을 계속해야만 하는 걸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현대인의 타협에 대한 생각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에 준거한다. 변증법은 ‘진리’와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고, 부딪치고, 좌절하면서 세상과 사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지식이 수정되고 더 보완됨으로써 내가 진리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는 논리다. 진리를 알거나 공동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만큼 강한 결기와 투쟁이 필요한 것이라는 게 변증법의 원리다. 진리에 대항한 오류, 발전을 가로막는 구태의 모든 세력과의 치열한 대립과 번성기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공동체는 더 큰 도덕적 이상을 성취하고 문명의 발전을 이룬다. 더불어 개인 차원에서는 진리를 획득하고,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근대인은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와 규율에 익숙하다. 우리가 이런 논리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때, 나와 타인의 관계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일 수도 있고 발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나와 다른 극단에 선 타자와의 피 터지는 경쟁을 통해 무엇인가 더 좋은 몫을 얻는 것이 선이고 진보라고 믿는다. 복고주의자의 관점에서도 변증법적 투쟁의 과정은 존재한다. 교회의 전통과 관행을 바꾸려고 하는 급진적 개혁주의자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교회의 가치를 지키면서 신앙의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와의 치열한 생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것과 시노달리타스 교회의 길은 완전히 다르다.

 

 

성령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사이’를 기다리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의 방식

 

내가 생각하는 진리를 획득하고, 진보를 이루기 위해 타인과 투쟁해서 이기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찾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즉 시노드 교회의 삶은 특정한 생각과 실천으로 타자를 굴복시키며 얻어내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나와 너의 말과 생각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를 사유하고, 그 사이에 함께 머물러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이다. 이 길은 치열한 변증법적 과정에서 새로운 진보를 모색하거나 전통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나와 타자의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여 진리가 밝게 드러나고, 새로운 길을 내도록 함께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험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몇 년 전 독일 쾰른대교구가 여러 가지 문제에 휩싸였다. 내용인즉, 교구에 성·재정·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교구장의 사임을 원했다. 여기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생각을 밝히셨다. 교황은 즉시 교구장을 해임하지 않고 6개월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이 거칠고 탁하면 명확하게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압력 단체가 많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는 이를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교황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교구장 해임 공문을 당신의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후,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셨다. 교황은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는 성령의 뜻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결정은 교황이 아니라, 결정권자와 관련된 타자들 사이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의 뿌리는 인내이며, 타인을 인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자기를 인내하는 것이 희망이며, 그 모든 희망으로 하느님을 인내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길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11월 19일, 최영균 시몬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 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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