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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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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5 ㅣ No.255

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

 

 

한국 성결교회의 기원과 발전

 

성결교회는 그리스도교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교파이다. 성결교회는 19세기 성결운동의 결과로 생긴 비교적 역사가 짧은 교회이다. 19세기 미국은 급격한 세속화를 경험했다. 기존 교회는 타락했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 이런 가운데서 다시금 성서적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일어난 운동이 바로 성결운동이다. 이 성결운동에서 나온 선교 단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양선교회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미국인 카우만과 일본인 나까다 쥬지가 일본에서 만든 단체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 동경에서 선교 사역자를 훈련하기 위해서 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이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이들은 1907년 동양선교회 선교사인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이 함께 한국에 와서 복음 전도관을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다.

 

한국에서 처음 세워진 성결교회는 무교동 전도관이었다. 이것은 후에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중앙성결교회가 되었다. 1907년 무교동 전도관이 세워지자 이것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양반의 교회로서 체면과 형식을 중요시하였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복음 전도관에서 활발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새 신자들뿐만 아니라 기존 교회의 신자들도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결교회는 확장되어 나갔다. 한국 성결교회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서 약 25년 뒤늦게 한국에 들어왔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서구의 대교단을 배경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여기에 비해서 성결교회는 성결운동에 참여한 소수의 신앙인들이 모여서 만든 선교 단체(또는 신앙 선교 단체)인 동양선교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분명한 자신의 선교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직접 전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한 선교이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보다는 직접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에 중점을 두었다. 둘째는 토착민 사역자 훈련이다.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토착민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았다. 따라서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선교하기보다는 성서학원(현재 서울신학대학교)을 세워서 토착민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통해서 선교하고자 했다. 셋째는 지역 분할 구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서로 지역을 분할해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후발주자인 성결교회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나 어느 곳에서든지 전해져야 한다는 신앙 때문이다. 따라서 성결교회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에 비해서 작은 교단이지만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성결교회의 전도 방법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성결교회가 이 땅에 들어온 비슷한 시기에 개신교의 다른 교파들도 들어왔다. 구세군과 안식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를 지나면서 성결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한국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다음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위에서 연유한 선교 방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더불어 성결교회의 중요한 특징인 부흥운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유수한 부흥사를 배출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경우가 정남수 목사와 이성봉 목사이다. 이들은 성령의 체험 역사가 분명한 사람들로서 간증과 노래로 대중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 쉽게 전했다.

 

하지만 성결교회의 성장도 잠시, 일제 말 성결교회는 일본 식민지 정책의 희생물이 되었다.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천황을 국체로 삼는 전시 체재로 들어갔다. 이런 일본 군국주의에 성결교회의 재림 사상이 문제가 되었다. 성결교회는 예수님이 재림하면 모든 사람이 심판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여 왔다. 총독부는 이것을 문제삼았다. 그래서 일본 경찰이 성결 교인들을 불러다 놓고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고 물었다. 결국 총독부는 성결교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해방이 되자 성결교회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도덕으로 무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성직자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일이 빈번하였지만 성결교회는 정치와는 관계없이 오직 복음을 통하여 국민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해방 후 혼란스런 한국 사회를 위하는 길이었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였고 나라는 온통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와 손을 잡고 구제 사업에 힘을 쏟았다. 고아원, 양로원, 학교 등 수많은 사회 사업 단체들을 세웠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성결교회에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교단의 분열이다. 성결교회 내에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교회협의회(NCC)의 가입을 놓고 의견을 달리해서 결국은 성결교회는 1960년대 초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런 아픔 가운데서도 성결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백만여 명의 신도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서울신학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성결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양 교단이 다 같이 해외 선교에도 힘쓰면서 전 세계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양 교단 사이에 한국성결교회연합회를 만들어 화해와 협력이 증진되고 있으며, 지난 5월에는 성결교회 창립 95주년을 맞이하여 공동 선교대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외에도 나사렛성결교회가 있다. 나사렛성결교회는 다른 성결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미국의 성결운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 나사렛성결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이 나사렛성결교회는 한국에 나사렛대학교를 세워서 운영하고 있으며, 나사렛성결교회는 경기도 안중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적 위치

 

개신교 신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성결교회는 매우 낯선 교파일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사 강의가 초대 교회에서 출발하여 종교개혁 시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비교적 근대 사회의 개신교 교파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방 교회의 전통이요, 다른 하나는 서방 교회의 전통이다. 성결교회는 서방 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다. 이것은 성결교회가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라 원죄론을 받아들이고, 죄와 사면이라는 법률적인 구원의 개념을 수용한다. 이런 점에서 성결교회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성결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다같이 강조하는 개념이다. 성결교회는 서방 교회 속에서도 개신교에 속한다. 중세 천주교가 행위를 강조하여 결국에는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공로 구원을 강조했다면 마틴 루터는 이것을 반대하여 믿음만의 구원을 말한다. 루터에 따르면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하 하느님으로 명칭)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개신교에서는 칭의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성결교회는 이런 루터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한다. 루터의 칭의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큰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소홀히 한 측면이 많다. 이점을 주목한 사람이 바로 요한 웨슬리이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칭의의 복음이 구원의 입문이라면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은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고 인정받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온전한 성화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웨슬리의 성화 사상은 토마스 아 켐피스와 같은 천주교 신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는 웨슬리의 사상이란 개신교의 칭의와 천주교의 성화 사상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웨슬리에게 칭의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자의 성화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의 후예들은 감리교를 만들었다. 웨슬리의 후예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성결이다. 웨슬리는 감리교가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성결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바  염려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성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19세기 미국 웨슬리안들의 대답은 성령 세례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sinful nature)을 변화시켜서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성령 세례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화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적인 견해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성품이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웨슬리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죄성에 물든 인간이 새롭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변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대해서 대다수 감리교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19세기 중엽부터 미국 감리교는 유럽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결을 단지 윤리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려 하였고, 성결이란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에게 인간은 원죄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이며, 따라서 이것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류 감리교인들과 성결운동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주류 감리교인들에게 성결은 윤리적인데 비하여 성결운동에 속한 사람들에게 성결은 하느님의 은혜요 성령 체험이었다.

 

성결운동은 감리교에서 나왔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또 하나의 거대한 운동을 만들어 냈다. 바로 그것이 오순절운동이다. 사실 성결운동은 일종의 성령운동이었다. 성결 집회는 바로 성령을 받기 위한 집회였다. 성결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 성령 세례를 받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이런 성결 집회에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성결 집회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결 집회에 방언이 출현하자 여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성결 그룹에서는 방언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방언운동이 무질서하게 보였고, 이들은 마땅히 강조해야 할 건전한 삶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을 하는 그룹에서는 방언은 분명히 성서에 나오는 은사요, 성령 세례의 표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두 그룹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결국은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은 성결운동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논쟁의 핵심은 성령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전통 성결파에서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의 죄성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오순절 그룹에서는 성령의 역사는 방언을 비롯한 은사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결운동은 정결(purity)을 강조하는 반면 오순절운동은 능력(power)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많은 성결파들은 과거와는 달리 오순절의 방언을 인정하고 있으며, 오순절운동은 성령운동이 건전하게 나가기 위해서는 성결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최근 성결운동은 영적인 역동성을 잊어 버렸다. 성결운동은 오순절운동과 재회를 통하여 다시금 영적인 역동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또한 많은 오순절 운동가들은 수많은 스캔들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건전하고 성결한 삶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서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이다.

 

 

성결교회의 신학적 특징

 

성결교회의 교회법에 따르면 성결교회는 개신교 복음주의에 속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복음주의의 특징에는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성서를 모든 권위의 근거로 보는 신앙이다. 이 점에서 성서와 전통을 권위의 근거로 보는 천주교와 구별된다. 성결교회는 신앙의 궁극적인 근거는 전통이 아니라 성서라고 주장한다. 성결교회는 웨슬리안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결국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성결교회는 자신의 교회가 사도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된 교회, 곧 사도적 교회는 신약 특히 사도행전의 신앙을 그대로 반복할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결교회의 독특한 교회론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합법성은 초대 교회의 사도권을 얼마나 역사적으로 계승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교회를 얼마나 재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복음주의는 부흥운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부흥운동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성서나 교리를 그대로 암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다시 한번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만나는 인격적인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정통주의와 다른 점이다. 정통주의는 단지 바른 교리에 관심이 있다면 복음주의는 바른 경험에 강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전도를 강조하는 신앙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전도자였다. 근대 개신교 선교는 바로 이들 복음주의 전도자들이 이루었다.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는 민족주의에 매여서 세계 선교를 등한시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가톨릭은 개신교가 선교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18세기 복음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개신교는 선교 전선에 열심히 나서게 되었다. 성결교회는 이런 전통을 계승하여 전도를 강조하는 교단이다. 특별히 성결교회의 신학 교육기관인 서울신학대학은 전도자 양성에 가장 큰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런 복음주의의 일반적 특징과 더불어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강조한다. 사중복음이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4가지 성서의 강조점을 말한다. 중생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이 중생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한 출발이라고 믿는다. 성결교회가 중생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단지 유아 세례를 받고, 예배에 참례를 하고, 헌금을 하는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내적인 확신이 동반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성결교회가 특별히 강조하는 교리는 성결이다. 성결교회 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자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온전한 신자, 곧 성결한 신자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성결은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부패한 마음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서방교회 전통은 아담의 원죄를 믿는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 곧 부패한 마음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성결이다. 둘째는 하느님 형상의 회복이다. 인간이 타락하자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던 하느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말았다. 성결이란 바로 파괴된 하느님의 형상이 다시금 회복되어서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생과 성결은 비교적 오랜 전통을 가진 교리이다. 하지만 많은 일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신유와 재림의 복음은 낯설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신유가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 사역의 많은 부분이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사에서 신유가 본격적으로 중심 주제가 되어 본 일은 없다. 그러나 19세기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신유운동이 일어났고, 이 신유운동은 20세기까지 확대되었다. 특별히 이것은 오순절운동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천주교회에서도 성령쇄신운동을 통하여 신유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신유 신앙의 핵심에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는 영혼을 구원하신 분인 동시에 우리의 육체적 질병까지도 치료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몸의 치료는 교회 사역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성결교회는 성경의 전통을 따라서 병든 자의 치료를 중요한 목회 사역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19세기 미국교회에서 신유의 복음과 더불어 강조된 것이 재림의 복음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19세기 후반 미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설교가 많아졌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종말론 연구가인 달비(John N. Darby)의 사상이 미국에 전해져서이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 미국의 상황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산업화로 도시화된 미국은 갖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사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 재림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가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인류의 종말이 멀지 않았고, 세상의 진보에 희망을 두는 대신에 그리스도가 약속한 천년왕국에 희망을 두게 되었다. 이 신앙은 한국 성결교회 신앙의 핵심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런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은 일제 시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원래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순복음이라고 불렀다. 순복음은 원래 영어로는 Full Gospel이었는데 순수한 복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온전한 복음의 뜻을 지녔다. 이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지 못했는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통해서 성서의 복음을 더 전체적으로 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신유나 재림은 성서의 중심 메시지인데도 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근대 복음주의에서 이것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가 이것을 수용한 것이다.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칭의의 복음은 우리를 죄악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다. 성결의 복음은 우리를 내면의 죄성에서 해방시켜 준다. 신유의 복음은 우리를 질병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준다. 재림의 복음은 이런 구원의 완성의 때를 알려 준다. 이런 의미에서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을 선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서 이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네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첫째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중생이다. 둘째는 참된 인간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은 온전한 그리스도인, 곧 성결한 신자이다. 셋째, 어떻게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유이다. 넷째는 인류의 궁극적인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성결교회의 고유한 영성

 

성결교회 영성은 어떻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에 집중된다. 성결교회의 사부라고 일컫는 이명직 목사는 회개의 과정을 다음의 다섯 과정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죄의 각성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는 통회이다. 이것은 보통 눈물로 표현된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고백이다. 이명직 목사는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사람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도 고백해야 한다. 넷째는 변상이다. 자신이 구체적으로 해를 입힌 사람에게 가서 그것에 대한 변상을 하는 것이다. 초기 성결교회는 이런 변상의 행위가 많았다. 변상할 대상이 사라졌다면 그것을 헌금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성결교회의 회개 과정은 천주교의 고해성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다같이 진정한 회개와 고백 그리고 배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천주교는 신부 앞에서 하지만 성결교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배상이 사죄의 조건이지만 성결교회에서는 용서받은 신자의 열매이다. 이런 회개의 과정은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에서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성결교회의 영성은 개신교 부흥운동의 영성의 맥락을 이어 받고 있다. 부흥운동은 부흥사들의 간증으로 이루어지는 설교와 신자들의 통성기도와 찬양으로 이루어지는 응답으로 구성된다. 부흥운동은 전통적인 성례전(성찬례)이나 종교 행위로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복음주의적인 영성의 독특한 형태이다. 그리고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이런 부흥운동을 통해서 신앙의 체험을 얻게 된다. 이런 부흥운동을 통해서 나타난 영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중적인 영성이다. 중세 수도원의 영성이 세상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헌신한 소수 엘리트들의 영성이라면 성결교회의 영성은 보통 신자들이 집회를 통해서 공동으로 체험하는 대중적인 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성결교회 신자들은 부흥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며 이것은 집단적인 성격을 가진다.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에서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영성운동은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흐름이다.

 

둘째는 표현적인 영성이다. 전통적인 영성 훈련은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내면적인 성찰이 강조된다. 하지만 부흥운동의 영성은 통성기도와 열정적인 찬양을 통한 자신의 종교적인 욕구를 표현한다. 이런 대중의 종교적 표현 때문에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대중들의 영적 욕구가 부흥운동을 통해서 분출되어 집단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것과 더불어서 부흥운동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공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셋째는 자아 포기의 영성이다. 성결 운동은 성령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은 어떤 종교적인 훈련이 아니라 성령을 향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령 역사의 장애물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주님의 제단 위에 산 제사로 드릴 때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넷째는 순간적인 영성이다. 부흥운동은 참된 영성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성령의 체험은 인간의 준비에 규칙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뜻밖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순간적인 영적 체험을 동반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영적 훈련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성령의 현존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갖는다. 이런 체험은 대부분 기쁨을 동반하며 치유를 경험하게 한다.

 

다섯 번째 마음의 정결을 강조하는 영성이다. 특별히 성결운동은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문제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죄성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강퍅한 마음을 어떻게 부드럽게 만들어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만드는가 하는 데 성결교회 영성의 특성이 있다. 웨슬리안은 일찍이 마음의 종교를 강조했다. 이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맺는 말

 

성결운동은 그리스도교의 긴 역사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운동이다. 따라서 성결운동 속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와 다른 특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근대 사회의 중요한 특성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근대적 특성이 항상 좋은 것일 수는 없다. 여기에는 많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대중성은 근대 사회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제점이기도 하다. 복음이 대중에게 전파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중의 천박성에 물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결교회는 오랜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성결교회는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들로부터 많은 역사적 경험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면 수많은 분파 운동들의 문제점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에 매여 현 시대와 적응하는 능력을 상실한 기존 교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할 수 있다. 복음은 생동력이 있어서 항상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 말씀의 능력이다.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목사)  /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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