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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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71: 위령 성월 한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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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15 ㅣ No.775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1) 위령 성월 한가운데서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은 우리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 지난해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서울 용산성직자묘지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 신자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능력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늙어감, 죽음

 

늦가을의 풍경은 어김없이 시간의 흐름을 절감하게 한다. 자연은 색깔이 바래져 가고, 사람은 몸이 늙어간다. 세월의 흐름 끝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지금의 이 시간, 지금의 이 나이에 이르렀듯이 언젠가 그 죽음의 시간, 그 소멸의 시점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세월의 흐름과 늙어가는 몸을 통해 죽음의 소멸을 예감한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죽는 그 순간은 경험의 경계를 벗어나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삼인칭인 ‘그’의 죽음과 이인칭인 ‘너’의 죽음이다. 삼인칭과 이인칭의 죽음은 과거와 현재의 죽음이 될 수 있지만, 일인칭의 죽음은 언제나 미래의 죽음이다.(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과거와 현재는 경험과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미래는 경험을 넘어서 있는 상상과 추론의 대상이다. 가깝고 친밀한 타자, 즉 이인칭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조금 더 정서적으로 체감할 뿐이다.

 

 

이별, 부재

 

죽음은 슬픈 일이다. 가끔 돌아보면 우리가 알던 많은 이들이, 내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게 된다. 갑자기 느껴지는 그들의 부재가 슬프고 가슴 아리게 한다.

 

삶과 죽음의 단절, 이승과 저승의 단절은 깊고 아득하다. 삶과 죽음의 이별은 참 아프고 쓰라리다. 이승을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저승으로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을 지녔던 사람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부재감은 참 서늘한 슬픔을 낳는다.

 

풍진 세상을 살면서, 진흙탕 같은 세속을 살면서,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허겁지겁 사느라,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이승의 땅에 나와 함께 있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내가 까맣게 잊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깊은 미안함에 사로잡힌다. 살아남은 자가 늘 죽은 자를 배반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죽은 자에게서 많은 것을 얻지만 생각은 늘 자신을 향해 있을 뿐이다.”(권경인 「낮아서 오르는 길」) 산다는 것은 언제나 망각과 이기심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위령의 날

 

우리 곁에 머물다 사라져 간 사람들을 신앙 안에서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의 이기적 무심함 속에서, 우리의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죽은 이들을 우리들의 따뜻한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마음 깊은 곳 안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그들을 위해 주님께 정성으로 기도하는 날이다. 비록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우리와 죽은 이들을 갈라놓고 있다 할지라도, 신앙 안에서 그와 나의 인연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날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삶과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지만, 주님의 시선 안에서는 삶과 죽음, 산 이와 죽은 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주님의 그 크신 능력 안에서 언젠가 우리는 이승을 떠난,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죽음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갈라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죽은 이들 역시 주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삶은 죽음을 매개로 더욱 빛난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조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가까이 알던 사람의 죽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자의 죽음은 언제나 그 순간의 충격일 뿐, 우리는 일상 대부분의 자리에서 죽음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사실, 늘 죽음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피폐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사는 것이 때론 우리 삶의 한 지혜이다. 하지만 또 때때로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역설적 소중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때론 죽음을 잊고 살아야 하며, 때론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묘한 줄타기의 연속이다.

 

운명은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운명을 극복하고 완성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 죽음의 운명을 건강하게 끌어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가는 여정이며, 삶과 죽음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승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고 또 완성되며, 죽음은 이승의 삶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죽음은 분명 삶을 소멸시키는 파괴적 힘이지만, 죽음은 또 한편 삶을 더욱 소중하고 빛나게 한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역설적으로 더 아름답다. 무한히 계속될 수 없는 이 이승의 삶, 언젠가 끝마쳐야 할 이 이승의 삶, 그래서 오히려 삶은 더 눈부시게 아름답고 눈물 나게 고마운 것임을 우리는 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죽음은 삶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삶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지, 죽음 덕분에 우리는 이 눈물 나는 노역(勞役)의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을 넘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한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는 철저히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그저 믿고 희망할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이 무로 돌아가는 소멸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성숙과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죽음이 우리 생의 완성과 성숙을 뜻한다면,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의 여정과 세월의 흐름 역시 완성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 그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인생도 늘 빛나고 새로울 수 있음을 우리는 믿고 희망한다. 산다는 것은 분명 죽음을 향해가는 슬픈 일임은 틀림이 없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늘 새로울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산다는 것이 또 얼마나 그 자체로 축복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산다는 것은 늘 새롭게 서 있는 것이며, 신앙인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성령 안에서 늘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11월 12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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