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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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5) 아브라함을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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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5

제5강의 : 아브라함을 부르심(5월 10일 오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절대적이요 조건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응답을 하였습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우리의 자유의사로써 당신의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응답을 하였습니까? 첫 인간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배은망덕과 배신으로써 응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는지, 어떻게 하느님의 눈을 피했는지 하는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잘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 죄의 핵심은 인간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범죄한 인간이 죄를 짓기 전, 그 악마가 유혹을 할 때에는 모든 것이 아주 그럴 듯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그 과일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여서 그것을 먹기만 하면 하느님과 같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범죄를 하였는데 범죄를 하고 난 다음에 자기들이 하느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자기들이 하느님을 거슬렀고, 그럼으로써 자기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떠났다는 것, 또 그럼으로써 자기들이 얼마나 헐벗고 있는지 자기들의 신체가 알몸이라는 것, 하느님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어떤 의미로 때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피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서 피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배신하는 죄는 사랑의 관계를 끊습니다.

 

이 범죄로 인해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가 단절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든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면전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아담과 하와를 하느님께서는 그냥 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아 나서신 것은 그를 벌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그들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초래한 죽음에서, 그 죽음의 어두움에서 구원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이 찾으심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러십니다. 찾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도 그러십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하느님을 찾고 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좀처럼 나에게 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찾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답을 줘야 할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했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하느님과의 이런 관계에 대해 묵상하고 나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 "오! 하느님, 당신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인 말로 표현하여 마치 당신이 저 태초에 오직 한 번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끊임없이 거듭거듭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매일 그러하시며 평생을 통하여 그러하십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우리의 영혼을 당신께로 향하게 하면 당신은 이미 거기와 계십니다. 당신은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만일 첫 새벽에 일어나서 그 즉시 제 영혼을 기도 속에 당신께 향하게 한다 해도 당신은 저보다 앞서 이미 와 계십니다. 낮에 분심을 물리치고 저의 영혼을 생각 중에 당신께로 돌리면 당신은 먼저 그 자리에 계십니다. 이렇게 언제나 그러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잊고 언제나 마치 당신은 처음에 한 번만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말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언제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깊이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 아오스딩의 {고백록}을 보면 하느님이 먼저 와 계신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애써 찾았던 그 하느님께서 이미 자기 안에 벌써 먼 옛날부터 와 계셨다는 것을 자기 영혼의 눈이 열리고서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 아오스딩은 {고백록} 10권 27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셨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도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심에 끝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리나이다." 여기서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사 눈멀음을 쫓으시네'라고 한 것은 물론 이제 와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밝혀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고 계셨는데 이제야 내 귀가 열리고 내 눈이  뜨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소리를 지르시고 그리고 빛으로써 내 눈을 밝혀주시는 그 하느님을 늦게야 계심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마치 어제의 강의에서 제가 인용했던 구상 시인의 {말씀의 실상}에서 '영혼의 눈을 씌웠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자 나를 에워싼 만유 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아무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하느님의 눈을 피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그들을 낙원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이것도 하느님께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범죄와 함께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실락원(失樂園)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는 말씀과 함께 즉시 구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의 끊어진 사랑의 관계는 그 후 점진적으로 회복되어 갑니다. 그것이 이른바 구세사(救世史)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구원 사업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데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란에 살던 이교도들 중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브라함아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즉시 믿음으로 답하고 하느님의 분부대로 자신의 집과 일가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여기서도 먼저 부르시고 찾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으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먼저 화해와 친교의 손을 내미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우정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41장 8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라고, '나의 친구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십니다. 또 창세기 18장 1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집에 들렀다가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러 가시는 길에 아브라함의 집에 들렸는데,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무엇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에 가시는지 그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어서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흥정을 하듯이, 의인이 50명이 있다면, 50명이 또 안되면 45명 있다면 이런 식으로 다시 10명까지 내려오는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거기서 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그 백성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시고 그들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과 배반,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려다가도 하지 못하고 예언자들을 시켜 거듭거듭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시는 하느님, 마침내 결정적으로 그 백성과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구세주의 탄생,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새 이스라엘, 즉 교회의 발자취를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전개시켜 볼 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이 부르심은 참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 멀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그런 의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사제로서의 부르심도 아브라함의 부르심 안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과연 아브라함에게는 이렇게 구세사 안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러한 부르심을 받을만한 어떤 자격이 있었을까요? 성서에서 보면 그가 이교도였다는 것과 자식이 없었다는 것, 그 외에 뚜렷하게 특기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무슨 인물이 잘났다든지 하는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뽑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그런 것에 개의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약속한 대로 후손이 많이 생겼고 이 후손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부르셨는데, 이때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간택되었을 때에도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였지 이 백성이 특별히 잘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7장 7절부터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에집트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는 집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 하느님 야훼, 그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다.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맺은 계약을 한결같이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1장 21절에서 29절의 사이에 말씀하고 계시지요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것도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서였습니다. 결코 그들이 잘 났거나 그들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이면서, 또 동시에 그들을 통해서 구하시고자 한 모든 이를 향한 그러니까 우리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에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에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했을 때 그대로 순명하였습니다"(히브리서 11장 8절-9절).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를 하느님께서 어디로 가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오직 자기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는 마음에서 그랬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물려받은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천막 생활은 유목민의 생활이요 정처 없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세상 어떤 것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바로 하느님이었습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였을 때에 기꺼이 그 명령에 응답했습니다."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많은 후손의 아비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이사악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뿐인 아들을 하느님께서는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는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로마서 4장 13절부터 25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의화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화를 위한 대표적인 것으로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의 조상,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에 그와 함께 믿는 모든 이들도 의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앙의 원형'(prototypus) 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신앙을 물려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믿고 충실히 계약을 따른다면 모든 면에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에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살이에서 구해내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시어 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그를 지도자로 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본 듯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믿음으로 파라오 왕의 분노도 무서워하지 않고 에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수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구출하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구하시고자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홍해를 건넌 지 불과 한 달만에 굶주림과 목마름의 시련을 겪게되자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차라리 에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거듭거듭 하느님 부르심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느님을 마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양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던 부재중에는 아론까지 백성의 성화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인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시킴으로 백성을 무마하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느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배은 망덕한 그들을 멸하고 싶다고 까지 모세에게 당신의 심경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주님, 제발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야훼여, 당신께서는 그 강하신 팔을 휘두르시어 놀라운 힘으로 당신 백성을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성에게 이토록 화를 내시옵니까? 어찌하여 '아하, 그가 화를 내어 그 백성을 데려 내다가 산골짜기에서 죽여 없애 버리고 땅에 씨도 남기지 않았구나' 하는 말을 에집트 인들에게서 들으시려고 하십니까?"(출애 32, 11-12)하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곧 모세의 믿음과 성실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노여움을 거두십니다. 그러시면서 야훼께서는 다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 "나는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이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34, 6-7). 이어서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토가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의 매는, 결국 그 매를 통해서 우리를 다시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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