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행복을 생각하는 자, 사랑의 길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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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136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2]

행복을 생각하는 자, 사랑의 길을 걸어라


“일흔여덟이 되신 선생님이 지금 어떤 위치에 계신지 보십시오. 아아,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생님을 그리워할까요!”

“한낱 외로운 홀아비인걸.” 로리 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루시 양이 울어드릴 텐데요? 루시 양의 딸도.”

“그래요, 고마운 일이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소.”

“그 정도면 하늘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당연한 말이오.”

“혹시 오늘 밤 선생님의 외로운 심정을 솔직히 말씀해 주신다면, 예를 들면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애정과 믿음, 감사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다정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억될 만한 선행을 베푼 적도 남에게 봉사한 적도 없다.’라고 하신다면 선생님의 일흔여덟 생애는 헛된 것이 되겠죠. 그렇죠?”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한다오.”

카턴은 다시 불길을 바라보았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 시드니 카턴과 자르비스로리의 대화)


바흐를 들으며

요즘 며칠 동안, 독일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인 이자벨 파우스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새로 나온 두 번째 음반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두 해 전에 그녀가 연주한 바흐의 이 매혹적인 작품의 첫 번째 음반을 친구에게 선물로 받고 한동안 깊이 빠져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 이 새 음반으로, 그녀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전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얼마 전 음반가게에서, 늦가을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 앨범의 표지사진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날 집에서 이 음반의 첫 음을 들으며 느낀 단순한 행복감은 어느덧 가시고, 이제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점점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그건 또 다른 행복이겠지요. 첫 번째 소나타의 아다지오와 푸가와 시칠리아나가 이어지는 대목을 듣고 있는 지금은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써왔던 행복에 대한 ‘가톨릭 철학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마무리하는 것이 저에게는 옳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경건하고 준엄하지만 생명력과 부드러움이 가득한 그의 음악이 행복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의 음악이 청자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초대하고 있듯이, 행복 역시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첫 번째 ‘가톨릭 철학 에세이’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썼습니다. 그때는 건반악기를 위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이었습니다. 인생이 같으면서도 다른 만남으로 이루어져서 마침내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유하는 듯한 음악이었습니다.


사랑을 생각하는 것, 행복을 생각하는 것

‘행복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응답으로 잘 알려진 것이 이른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행복관을 쉽게 주지주의적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행복의 정의는 철학자들에게나 가당한 행복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바라봄으로서의 행복이 사실은 정화되고 완성된 사랑을 가리킨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가 인식의 행복을 말할 때 전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완전한 앎은 사랑의 앎’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앎을 주는 “믿음조차도 사랑에 의해서 제 형상을 얻는다.(Fides caritate formata.)”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인 애덕(caritas)은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한 사랑이니, 그러한 사랑은 완성된 삶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이러한 문자 그대로 복된 성인들에게나 가능한 사랑이, 삭막하고 곡절 많은 나의 인생 한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을지 우리가 근심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인들 역시 어디에선가 그 첫발을 내딛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랑의 출발점, 또는 사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 갈림길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행복에 대한 추구에서 진정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한 말에서 사랑으로서의 행복을 향한 출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여하튼 사랑을 하면서만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부족함과 상처가 가득한 나이지만 나에게 다가온 사랑에, 또는 사랑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사랑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면 그 여정에서 참된 행복의 길이 밝혀지지 않을까요?

최근에 뮤지컬로도 잘 알려진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고풍스럽지만 멋진 표현과 강렬한 멜로드라마가 인상적인 명작입니다.

이 소설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신과 절망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쳐간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인 루시가 보여준 연민 어린 순수한 사랑에 감사하고 응답하며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그가 마침내 성인이 느끼는 행복에 다가섰다는 것을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행복이라는 명제는 사랑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시도하는 이에게만 진리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길은 다름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또 다른 부족한 사람들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한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무한을 닮은 사랑으로 함께 나아가는 길이 행복의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카이로의 넝마주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었던 우리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인 에마뉘엘 수녀님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생생한 힘으로 다른 결핍의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살아있는 자로 새로이 태어나게 한다. 귀를 기울여보라. 네 주위에 너 아닌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는 무언가가 있는가? 하나의 결핍이 다른 결핍에게 응답할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무엇인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 이미 많은 사람들은 영원의 얼굴을 얼마쯤은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사랑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향한다. 자신의 밖을 향하는 매일의 움직임은 일상적으로 살며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허무와 유한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것이다”(에마뉘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사랑이 나의 행복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행복이 참이 되기를 바란다면 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기를 갈구해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의 저서 「칠층산」에서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멋진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각을 마치며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해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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