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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투쟁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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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10 ㅣ No.1661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투쟁하는 신앙

 

 

삶은 영적 투쟁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평온한 삶을 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분열, 갈등, 분노, 투쟁, 싸움. 이런 단어들은 신앙의 삶 안에서 무언가 불온한 느낌을 줍니다. 일치, 평화, 용서, 화해. 이런 단어들이 영성의 삶과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투쟁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신앙의 미덕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우리는 흔히 합니다. ‘투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괜히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종교 이념주의자들, 종교 급진주의자들의 호전적인 모습을 상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8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물론 교황님의 이 선언은, 타종교에 대해 호전적이고,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심판하고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삶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 속에 있는 악과 중단없는 투쟁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악과의 투쟁

 

신앙인의 투쟁은 단순히 세상의 풍조와 경향에 대한 저항이 아닙니다. 또한 단순히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투쟁”의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인의 투쟁 안에는 “나태, 음욕, 질투, 시기 또는 그 밖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나쁜 성향에 대한 투쟁”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보다 근본적인 투쟁은 “악마, 곧 악의 우두머리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투쟁”을 의미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9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악마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지적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한 자”이며, “우리를 공격하는 인격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악의 힘이 우리 가운데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확신을 가질 때에, 우리는 악이 때때로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0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악마를 하나의 신화, 표상, 상징, 비유, 또는 관념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악을 인격적 실재(reality)로 보지 않고 추상적 관념(idea)으로 여긴다면, 악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미움, 우울, 시기, 악습의 독을 퍼뜨립니다. 우리가 경계를 풀 때, 악마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1항)

 

악마의 존재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악의 인격성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통해, 악과 싸우는 것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인지, 악과의 투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여정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적 타락

 

하염없이 긴 영적 투쟁의 여정에서 신앙인들은 자칫 지치고 피로해질 수 있습니다. 늘 깨어 영적 투쟁을 지속하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투쟁을 그만두고 적당히 악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발생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신앙의 여정은 끝없는 영적 투쟁의 연속이기에, 이 긴 투쟁을 인지하고 끈기 있게 깨어 준비하지 못한다면, 실패의 희생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패는 영적 타락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영적 타락은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중대한 죄를 짓지도 않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심각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적당히 자기 합리화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무감각과 자기 합리화는 신앙을 식어가게 하고 영적 타락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갑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4항) 즉, 자신의 신앙과 영적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영적 무감각에 이르게 되고, 영적 무감각은 결과적으로 영적 타락을 초래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영적 타락이 죄인의 쇠락보다 더 나쁘다고 강조하십니다. 영적 타락은 자기기만과 자기만족의 눈먼 형태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이 정도면 뭐 괜찮겠지’, ‘그래도 난 어느 정도 노력했으니 괜찮아’, 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더 섬세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쉽게 영적 타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악마에게서 자유로워졌다고, 자신의 삶이 이제는 정돈되었다고 확신했던 사람이 결국에는 더 악한 일곱 영에 사로잡혀 버린 이야기는(루카 11,22-24) 자기만족의 수렁에 빠져 끝없는 영적 투쟁의 길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5항)

 

 

깨어있는 신앙을 위하여

 

“우리에게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복음을 선포할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8항) 영적 투쟁을 위해 신앙인은 주님께서 주신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기도, 하느님 말씀의 묵상, 미사 참여, 성체 조배, 고해성사, 자선 활동, 공동체 생활, 선교 활동”(162항)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힘과 영적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이 외에도 가톨릭교회에는 신앙과 영성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양식들이 있습니다.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 우리는 그 힘으로 악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깨어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불변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변합니다. 신앙도 퇴색되어 갈 수 있습니다. 수련하는 신앙만이 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선한 모든 것을 증진하고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고 사랑을 키우는 것”(‘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3항)이 악과의 영적 투쟁에서 신앙인이 지향해야 할 방식입니다. 영적 투쟁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 “중립으로 남아 있기를 선택하고 하찮은 것에 만족하며 주님께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려는 이상을 포기한 사람들은 결코 [영적 투쟁에서]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163항)

 

악의 세력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절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패배감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영적 투쟁에서 신앙의 가장 큰 무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강인한 온유함”을 뜻합니다.(163항) 신앙 안에서 인내하며 온유한 방식으로 싸워나갈 때, 악과의 투쟁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9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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