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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6: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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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06 ㅣ No.39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6)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 (상)

‘금녀의 벽’ 넘어 대표적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Elisabeth Schssler Fiorenza)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여성주의 성경 해석’을 가르치고 있는 가톨릭 여성신학자입니다. 그의 신학 방법론에 관한 강의는 미국의 보스턴 지역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필수 과목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1996년에 한국을 방문해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그리고 한국기독교공동학회의 25번째 정기 학술대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삶과 신학 사상에 대한 다음의 소개는 글렌 에난더가 쓴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루마니아 태생의 똑똑한 여자아이

엘리사벳 쉬슬러는 1938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9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당시 여섯 살이던 엘리사벳은 부모와 함께 피난을 떠나 전쟁 난민이 돼 이곳저곳을 표류하다 전쟁이 끝나던 1945년에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엘리사벳의 아버지는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전쟁으로 학교에 다니다 중단하기를 반복한 엘리사벳은 세 번째로 다시 1학년에 입학했는데, 곧 뛰어난 학업 수행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됐는데, 루터교가 주를 이루고 있던 지방에서 한 가톨릭 소녀가 이토록 뛰어난 성적을 얻게 된 것이 당시에 많은 이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10대 소녀였을 때 수도자가 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당신부님께서 엘리사벳은 순종 서원을 사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조언을 하시면서 수도 성소를 포기하게 하셨는데, 이후에 그 충고는 아주 현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학문, 신학에 문 두드려

1958년 엘리사벳은 대학 예비과정을 마치고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역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962년에는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MDiv)를 취득하고 1963년에는 박사 학위 바로 밑에 해당하는 상급석사 학위(licentiate)를 취득했습니다. 그 후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뮌스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71년에서 1984년까지 14년간 미국의 유명한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당시 노트르담 대학교의 종교학부에서 피오렌자 교수는 유일한 여성 교수였다. 사진은 노트르담 대학교 캠퍼스에 세워져 있는 이 대학 설립자 에드워드 소린 신부 동상. CNS 자료 사진


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전 과정 동안 엘리사벳은 거의 모든 수업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그 때문에 엘리사벳의 뛰어난 성취는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어떤 교수들은 엘리사벳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지만 일부 교수들은 여성이 신학 석ㆍ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굳은 결심으로 이 학위들을 차례로 취득했습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신학이란 남성들의 학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유일한 여학생으로서 처음 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여성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1964년 상급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엘리사벳이 쓴 논문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하는 봉사직에 초점을 둔 사목신학에 관한 것으로, 이 논문은 「잊힌 동반자」(Der vergessene Partner, [Dsseldorf: Patmos Verlag, 1964])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습니다. 엘리사벳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박사 학위를 받기에도 충분하다는 평을 얻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에 같은 대학인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루돌프 쉬낙켄부르그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신학박사 학위 과정에서도 엘리사벳은 당연히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응하며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어서 겪어야 하는 불이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쉬낙켄부르그는 당시 세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었는데, 그는 신학의 미래를 쥐고 있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줘야지 미래도 없는 여학생에게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평신도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엘리사벳의 실망은 매우 컸습니다.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고 성적도 누구보다 뛰어났음에도, 엘리사벳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학업성취능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사벳은 뮌스터대학의 요셉 슈라이너 교수를 만나게 됐고, 그의 지도로 박사 학위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슈라이너 교수는 엘리사벳에게 대학의 연구직도 마련해줬습니다.

뮌스터대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장차 남편이 될 프란시스 피오렌자를 만나게 됩니다. 현재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가톨릭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프란시스 쉬슬러 피오렌자 교수는 당시엔 미국 볼티모어의 성 마리아 신학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63년에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가서 유명한 두 분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종종 엘리사벳에게 뷔르츠부르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하고 농담으로 말하곤 한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평생 서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964년에서 1970년까지 뮌스터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의 논문을 읽어줄 교수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에 최고 졸업논문상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7년에 프란시스 피오렌자와 결혼하여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미국의 유명한 가톨릭대학인 노트르담 대학에 교수직을 얻어 197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종교학부 유일한 여성 교수

신학 교육을 받는 동안 엘리사벳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가 세속 안에서 어떻게 현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주된 논제로 다루고 있었는데, 엘리사벳은 신학생들이 세속 사회에서 살고 그 사회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배우게 하려면 신학교가 여학생들에게 개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 제안은 1960년대의 독일에서는 꽤 충격적 제안이었고, 이런 주장을 제기한 엘리사벳의 첫 번째 책에 머리말을 썼던 지도교수는 그 문장 때문에 머리말을 쓰는 것을 주저했다고 합니다.

1971년 미국에 와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피오렌자 교수(이후부터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는 피오렌자 교수로 지칭함)는 여성이 신학 고등교육 과정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잊지 않았고, 자신의 이런 경험이 이후의 학문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고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71년에서 1984년까지 14년간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칩니다. 당시에 노트르담 대학교의 종교학부에서 피오렌자 교수는 유일한 여성 교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피오렌자 교수가 대학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노트르담에서 가르치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피오렌자 교수는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기억하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여성신학적 재건」(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 [New York: Crossroads, 1983; 1994]; 우리말 번역으로, 김애영 역,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종로서적, 1986년)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성경 연구의 패러다임에 도전을 제기하는 것으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피오렌자 교수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더욱 고립됐고 결국 그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1984년에 노트르담 대학교를 떠난 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 대학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4년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1988년에 미국의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가 그곳에서 최초의 ‘크라이스터 스탕달 교수’(하버드의 유명한 신약학 교수 크라이스터 스탕달을 기려 그 이름을 딴 교수직)가 됩니다.

케임브리지에서 피오렌자 교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그의 사상이 성숙하게 됐는지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김영선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 ▲ 미국 보스턴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으로 박사 학위 취득 ▲ 가톨릭대 성신교정, 서강대학교, 가톨릭교리신학원, 수도자신학원에서 히브리어와 역사서, 지혜문학, 구약입문 등 강의

[평화신문, 2014년 6월 1일, 김영선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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