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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성령과 기: 너희는 너희에게 오시게 될 성령의 힘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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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194

성령과 기(氣) : 너희는 너희에게 오시게 될 성령의 힘을 받게 될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7)라고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위의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는 너희에게 오시게 될 성령의 힘을 받게 될 것이다.”(사도 1,8)라는 말씀 말이다. 이렇게 성령은 무엇보다 힘으로 나타난다. 이 힘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 당신의 성령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희로 하여금 그분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1) 라고 기도한다.

 

이 성령께서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선사되어 계신다. 그분은 우선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힘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분을 통하여 건설되었고 그분 자신이 교회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교적인 전통 안에서 성령은 항상 생명과, 그리고 생명의 중재와 연관되었다.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DH 150 참조)”2)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안에서 그 생명력으로 활동하신다. 힘으로서의 성령이 더 잘 활동 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께 협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힘이 더 잘 발휘되는 것이다. 그분의 힘이 더 잘 발휘되도록 자신의 힘을 빼야 한다는 말이겠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성령을 위하여 열려져 있어야 하며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성령이 자신 안에 일하게 하면 할수록 그분의 힘은 더 크게 발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선사되어 계신다. 그분은 교회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생명력이시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지혜 1,7), 어디에서나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이다.3)

 

성령은 엄격하게 말해서 ‘거룩할 성(聖)’자를 뺀 ‘영(靈)’은 이미 구약성서에서부터 하느님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성령론도 성령을 하느님의 힘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성령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이 관점은 오늘날의 성령론에서 희미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성령은 구약성서적인 영으로 보다 신약성서적인 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나는 듯 하다는 말이다.

 

이제 성령은 하느님의 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연결된 하느님의 영으로, 삼위일체 안에서의 셋째 위격으로, 성령 칠은·카리스마 같은 영적 은총의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령의 망각(Geistvergessenheit)’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 역사 안에서 소홀히 되고 잊혀졌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로마의 통치 하에서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회심한 이후에 종교의 자유를 얻고(313년),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380년) 이후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비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특혜를 누리고 제도와 조직, 전례와 같은 형식과 관례까지 로마로부터 받아들여 소위 ‘제국교회’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성직자들이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어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들의 교회’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성령이 교회 안에서 소홀하게 여겨진 원인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성령적인 소홀함은 신학 안에서도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교회론과 성사론에서 그렇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전까지의 교회론과 성사론은 성령에 대한 관점을 소홀히 했다는 말이다. 성령의 이해, 특히 인간 안에서는 물론이고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힘으로서의 성령의 이해는 극동 아시아적인 ‘기(氣)’ 관념과 여러 가지로 비슷하다. 생명력으로서의 기 관념은 철학 안에서만 이 ‘영’이라는 독일어 단어(Geist)처럼 일상 언어 속에서도 만나지는데, 이 기 관념은 기가 통용되는 언어권, 특히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보다 나은 영 이해(靈理解)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에 대한 통례적인 표현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기 개념으로 하는 이러한 토착화(土着化) 시도는 고무적이다. 기 개념이 하느님의 힘으로서의 영의 전망을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비그리스도교인이나 성령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성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성령을 가리키는 중국, 한국, 일본의 표현인 ‘거룩한 영(聖靈)’은 신적인 힘으로서의 성령은 드러내지 못하고, 성령이 마치 ‘거룩한 귀신’ 이나 ‘거룩한 영혼’인 듯 생각하게 하지 않는가? 하지만 기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성령론적인 전망을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게다가 성령은 삼위일체의 신적인 위격 중에 그 신학적 이해가 우리 문화 안에서 가장 적게 토착화된 위격으로 보인다. 첫째와 둘째 위격은 벌써 ‘아버지’와 ‘아들’,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에서부터 토착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령의 망각 내지 소홀히 함의 원인은 성령이 충분히 토착화되지 못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앞으로의 글을 통해서 교회와 인류 안에서의 삶의 힘, 혹은 생명력으로서의 성령이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그분이 신학과 또한 교회의 삶 안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좋겠다. 먼저 성령의 재발견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어떻게 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고, 다음으로 우리 교회 성령론의 토착화를 위해서 기 개념을 살펴보겠다.

 

[월간 빛, 2003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교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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