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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명동주교좌본당 사순절 특강4: 완전한 삶과 기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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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2 ㅣ No.113

명동주교좌본당 사순절 특강 (4) 완전한 삶과 기쁜 소식


최선 다하는 삶, 완전한 삶

 

 

사순절의 의미

 

성경에는 '과월절', '무교절', '파스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절기들은 서로 유사한 잔치다. 그래서 새 성경에는 파스카로 통일해 표기하고 있다. 파스카는 과월절이나 해방절로도 불린다.

 

고대인이나 유다인의 선조는 유랑생활을 했다. 천막을 치고 살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 이때에는 막막한 마음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날 밤 지내던 것이 파스카다. 따라서 파스카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새 삶으로 건너가는 것을 뜻한다.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빵을 만들어 먹었다. 새 누룩으로 빵을 먹으려면 누룩 없이 빵을 만드는 시기를 지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파스카와 무교절을 함께 지내게 됐다.

 

예수님이 빵을 쪼개는 행위를 보여주셨듯, 누룩 없는 빵은 제병과 같이 잘 쪼개진다. 유다인의 파스카는 부활시기와 맞물려 있다. 파스카와 무교절이 부활절 의미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순절에 커피를 줄이거나 담배를 끊거나 한다. 고통을 통해 새 삶으로 건너가기 위함이다. 그동안 삶을 통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과 함께 새 부활의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다.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새롭게 건너가는 삶을 마련하신다.

 

 

자유와 평화

 

여러분이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리스도교는 부활 신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 없이는 교회도 없다. 예수님 시대에 교회는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확신이 없던 제자들은 숨어 지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확신을 하게 됐고, 교회 공동체를 형성했다.

 

구약에서는 탈출기에서 부활 신앙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탈출기 하면 바다가 갈라지는 물리적 현상 부분에만 관심을 갖는 신자가 많다. 그리고 해방, 구원하면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해방시킨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노예생활 같은 물리적 억압으로의 탈출이 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노예생활에서의 탈출이 해방을 뜻한다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갔어야 옳다.

 

하지만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그들 앞에는 광야가 펼쳐진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다. 숫자 40은 완벽함을 뜻한다. 이들에게는 4는 동서남북을 뜻하는 완벽한 숫자이며, 또한 완벽함을 뜻하는 10이 합해졌다. 광야에서의 40년은 지독한 고통의 시간을 뜻한다. 그들은 왜 광야의 40년을 거친 뒤 축복의 땅에 도착했을까.

 

의심이 많은 백성은 모세에게 끊임없이 불평하고 대들었다. 의심은 앎의 부족에서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으로는 노예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자신은 진정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아는 하느님은 야곱과 아브라함 등 제삼자의 하느님이었을 뿐이다. 나의 하느님을 알고 만나는 곳이 광야다. 광야에서야 말로 앎이 완성된다.

 

계약은 상대방과의 믿음, 곧 앎이 전제돼야 성사된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이 이뤄진다. 여러분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을 것이다. 광야의 40년은 지독한 결핍과 외로움의 기간이다.

 

결핍이 있어야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은 쇠창살 밖 보도블록 사이로 작은 들꽃이 피어난 것을 보고 우주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극도의 결핍 때문이다. 결핍은 주위 모든 것을 재발견하게 한다. 우리는 풍요로움 때문에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1950년대보다 요즘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하느님의 총애라 생각하고 구원을 받는 길이라 여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두고 온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으려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평화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제자들 앞에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신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수난하고 죽고 부활한 뒤 오는 것이 평화다.

 

가정에 평화가 없다면 '내 안에(또는 우리) 예수님이 안 계시는구나'하고 여기면 된다. 미사 중에 신자들과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상대방에게 하느님이 서시길 기원하는 것이다.

 

완전한 삶은 하느님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의 삶과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완전한 삶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평화신문, 2009년 4월 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정리=이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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