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교의신학ㅣ교부학

[성령] 성령과 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210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회이해가 성령과 관련되어 변화를 보인다.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이 다시 발견되고, 그로써 교회 또한 새로이 발견되는 것이다. “성령에 관한 가르침이 충분하지 않다.” - 계속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안에 대해서 비판을 하던 동방교회와 개신교 측의 옵서버들 또한 이러한 근심어린 외침으로 성령에 관한 논의를 환기시켰다. 이들과 또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가톨릭 신학자들의 길고도 열띤 논쟁 끝에 공의회는 성령론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령론은 -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사이에 그리고 마리아론보다는 앞이라는 - 신학 안에서의 바른 자리에 놓여지게 되었다.

 

지난 수 세기에 공공연했던 교회와 신학에 있어서의 ‘성령의 망각’은 이제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 활동에 대한 재발견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비록 공의회가 특별한 성령론은 내어 놓지는 않더라도, 공의회의 지향이 다시금 성령에 대한 믿음에 있고, 또 영의 활동을 묘사하고 있으니,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Lumen Gentium(인류의 빛)’은 일종의 성령론적인 교회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공의회의 다른 중요한 문헌들도 성령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성령론적인 인식들이 한층 새롭고 균형 잡힌 교회이해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1. 공의회 이전의 관점들 : ‘corpus mysticum(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신앙의 신비인 동시에 경험적인 실재로서 복합적인 그 무엇이다. 그래서 교회는 영 안에서의 모임이기도 하며 제도요 기관이기도 한 것이다. 교회의 현실은 여러 가지 표상들로 표현되는데, 그래서 어떤 교회상들은 교회의 단면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중세기의 교회는 ‘법제적으로(juristisch)’ 나타나는데, 곧 황제와 통치자, 성직자와 교계제도로서의 교회가 그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의 교회이해 또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아직도 그리스도론 한쪽으로만 치우쳐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전에 성령의 역할에 대한 재발견과 관계하여 변화가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Mystici Corporis’(1943)가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회칙으로써 교회론 전체가 신비적인 몸의 관점으로 고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 회칙은 새로운 교회론의 발전에 있어서 일종의 시금석과 같이 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이 회칙이 순전히 법제적인 교회 이해에 반대하여 성서적인 언명들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칙은 사도 바울로처럼 교회를 그 머리가 그리스도인 신비적인 몸으로 고찰한다. :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칭은 그리스도가 당신 신비적인 몸의 머리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마치 그리스도의 둘째 인격인 것처럼 그리스도가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 안에서 사신다는 것에서도 명백해진다.”

 

더 나아가 ‘Mystici Corporis’은 교황 레오 13세의 ‘Divinum illud munus’에 연결하여 성령이 교회의 영혼임을 강조하고 있다. :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한편, 성령은 그 영혼이다.” 교회의 영혼으로서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원리로 보여진다. 특히 성령은  교회 안에서의 신적인 힘의 원천으로도 인식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로부터 모든 힘이 교회와 그 지체에로 흐르는 원천이라는 것에는 사실 그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이라는 교회의 표상은 교회론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표상이 교회를 나눔이 없이, 가시적으로, 구조적으로, 또 교계제도적으로 하나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정된 지체들과 함께 하는 전체로써 죄인 또한 그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창시자요 머리로서 자신의 몸을 (법제적인) 파견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보존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순전히 은유도 아니고, 육체적인 일치도 아니며, 신비적인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불구하고 회칙은 아직도 전통적인 교회이해의 편협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회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인, 사회-조직적인 실재로 파악하는 바울로적인 이해이다. 덧붙여 회칙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과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동일성을,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소속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원들만이 또한 신비적인 몸의 지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이라는 표현은 교회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적절한 정의이다. 이 몸은 사회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볼 수 있고, 교계제도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현실적으로 (관념적도 윤리적도 아닌, 신비적인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제 공의회는 일찍이 시작된 쇄신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받아들여, 수세기 동안 지속된 교회의 전통에다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통 또한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월간 빛, 2004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2)

 

 

2. 성령과 새로운 교회이해

 

가. ‘성사’와 ‘신비’로서의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 관한 교회의 공의회”로써 또 “교회의 고유한 자기이해에 대한 성찰”로써 공의회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그를 넘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백성’, 이 두 가지 교회상(敎會像)은 성사와 신비로써의 개념들을 통해서 다시금 심오하게 되었다. 바울로적인 개념인 ‘성령의 궁전’(1고린 3,16; 2,고린 6,16; 에페 2,21 참조)은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상과 대등하게 여겨진다.

 

나. 성사로서의 교회

 

교회의 ‘성사성(Sakramentalit  t)’은 일찍이 고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언급되었다. 그들의 규정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결정적으로 받아들여 정의하게 된다. 교의적인 헌장인 ‘Lumen Gentium(인류의 빛)’에 따르면,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와 동시에 인간 상호 간의 일치를 가리키고 일으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사로 표시되는 것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교회헌장 1) 교회가 성사라면, 교회 자체가 그 신앙의 내용에 속하고 신비적인 요소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성사성은 칠성사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성사성이다. : “성사개념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성사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성사들에 앞서 있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성사라면, 그때의 교회는 ‘원성사’, ‘뿌리성사’(O. Semmelroth), ‘기초성사’(K. Rahner), ‘보편적 성사’(교회헌장 1항)이다. 이 성사 안에서 그리고 이 성사로부터 (일곱) 개별 성사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교회 성사성의 원천은 성령이시다. 그래서 ‘Lumen Gentium’은 교회의 성사성을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파견에 관련시켜 말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로마 6,9 참조) 생명을 주시는 당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당신 몸인 교회를 구원의 보편 성사로 세우셨다.”(교회헌장 48항)

 

성사로서의 이러한 교회이해는 근대 교회론의 승리주의와 성직자주의 그리고 법제주의를 벗어나게 한다.

 

다. 신비로서의 교회

 

교회는 일종의 ‘신비(Mysterium)’이다. : “교회는 신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그리고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봉사하는 구원의 기구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리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존재와 가치와 활동성을 가지고 있기에 성사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신비로 이해한다. 그것은 교회가 구원이 충만한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인간의 정신으로 결코 완전히 밝혀질 수 없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희랍어 단어인 ‘mysterion’은 라틴어 단어인 ‘sacramentum’으로 - 가끔은 차용어인 ‘mysterium’으로 -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mysterium’은 ‘신비’, ‘sacramentum’은 ‘성사’라는 뜻을 지니므로, ‘신비’로서의 교회이해는 ‘성사’로서의 교회이해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교회헌장 ‘Lumen Gentium’은 교회를 무엇보다도 신앙의 신비로 묘사한다. 헌장 제1장의 제목이 ‘교회의 신비(De Ecclesiae Mysterio)’인데, 이는 여기서 말하는 성사로서의 교회이해가 신비개념의 전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교회 신비의 원천으로 다시금 성령이 언급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자들의 마음 안에 성령은 궁전 안에처럼 계시며, 그리스도의 나라, 곧 교회는 아주 신비스럽게 현존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에서 자라고 있다.(교회헌장 3항 참조) [월간 빛, 2004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3)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신약성서적인 관념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됩니다.”(에페 5,23)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그리스도의 몸’은 바울로와 제2바울로의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교회상이다. 바울로가 말하는 이 상징은 특별히 ‘성찬례’에서 더 분명해진다. :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아우구스티노 또한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적인 몸’과 ‘그리스도의 교회적인 몸’의 현존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동일성을 논하면서 ‘성체성사’와 ‘교회’의 상호간의 긴밀한 관련성과 제약성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12세기까지 그리스도의 몸(corpus)으로 항상 성체성사와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노와는 달리 ‘성체성사적인 몸’과 ‘교회적인 몸’이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두 국면을 한 가지 실재의 두 가지 양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개념적으로 구별하기를 좋아했다. 즉 교회와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의 두 가지 현존 양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성체성사적인 형태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차별하여)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성체성사’가 각각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과 ‘참된 몸’으로 구별되어 이해됨으로써, 신약성서와 고대교회에 있어서 본질적이었던 이해라 할 수 있는 성체성사와 교회 간의 밀접한 결합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념의 옛 의미는 희박해지게 되었고,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라는 신비적인 몸 대신에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신비적인 몸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신비적인 몸으로 이해됨으로써 - 그 머리가 교황이 되는 - 그리스도인이 모인 몸으로서의 단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이해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론의 테두리 안에 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가 너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흠 없이 완전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교회의 개혁이 꼭 필요한 것으로 요청되지 않아) 항구하게 쇄신을 필요로 하는 교회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너무 법제적으로,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정의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개념도 많은 변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관점에서 중세기의 교회는 이렇게 묘사된다. : “교회는 점점 더 신법(神法)의 기관이 되어갔으니, 그 질서는 엄한 법률적인 제도에서 나오고, 그 일치는 하나의 볼 수 있는 머리 안인 로마 교황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되, 그 머리가 로마의 주교좌인 교계제도적으로 조직된 유기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교계제도적인 교회의 모델로 왜곡되어 버렸다.

 

19세기에 가톨릭교회의 ‘튀빙엔 학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의 본래적인 의미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 가장 중요한 교회론적 대표자는 자일러(J.M.Sailer,1751-1832)의 영향을 받은 묄러(J.A.M  hler,1796-1838)와 드레이(J.S.Drey,1777-1853)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성서적 개념(로마 12,4-8; 1고린 12,12-31; 에페 1,22-23)을 새롭게 발견하였고, 그 개념으로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과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학파가 주창한 새로운 교회론은 “교회가 영혼들 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과르디니(R. Guardini)의 말을 그 모토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 교회론은 다시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관념을 숙고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개념은 마침내 회칙 ‘Mystici Corporis(신비체)’를 통하여 최종적인 교회직무의 비준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확실한 벨라르미누스적인 정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으니, 직무로부터 교회의 정의가 문제시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Mystici Corporis에서 직무의 구조까지 몸의 개념에서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하였다. :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한 몸인 교회를 당신의 신적 은총으로 채워 주시어(에페 1,22-23 참조), 교회는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을 향하여 나아가 그 충만함에 이르게 된다.”(에페 3,19 참조, 교회헌장 7항)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형하셨기에, 그리스도의 교회적인 몸은 그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토대 위에 지탱된다.(갈라 6,15; 2고린 5,17; 교회헌장 7항 참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분께서 이 지상 위에 볼 수 있는 표지로 삼으시고, 또 항구하게 그러한 표지로 기르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신앙인들의 일치성 안에서의 다양성, 구성원들의 상호 의존성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의 필연성과 그 연대적인 연결성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새롭게 강조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해는 바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나왔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그 몸과 함께 하시는 성령도 같이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주신다.(교회헌장 39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결합되어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의 원천이며, 그리스도의 몸은 계속해서 성령으로부터 활력을 받는다. :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불러 모으신 당신 형제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신비로이 당신의 몸을 이루셨다. … 그 성령께서는 친히 당신의 힘으로 또 지체들의 내적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시고 신자들 가운데에서 사랑을 일으키시고 재촉하신다.”(교회헌장 7항)

 

하지만 이러한 사고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바울로는 이미 성령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입문을 위한 원리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 “유다인이든 그리이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고린 12,13)

 

그리스도의 몸 안에 성령께서 사시며,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성령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지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그리스도의 몸 안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영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월간 빛, 2004년 7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4)

 

 

*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유래하는 관념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신랑에 대한 신부의 관계로 표현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호세 2,4-20; 에제 16,23; 이사 61,10; 62,4-5; 아가; 시편 45 참조)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비교한다.(에페 5,23-33 참조) 요한 묵시록 또한 이 관념을 언급하고 있다. :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22,17) 이렇게 성서를 기초로 언급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상은 초기 교회의 자의식 안에서 특별한 강조점을 갖고 형성되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라는 관념을,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와 인류의 결혼이라는 관념을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전례는 이 신비를 취하여 축제로 지내고, 다음으로 전통은 이 신비를 은총과 사랑을 통하여 생겨난 선택과 부르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를 통하여 마치 인류와 혼인한다는 견해가 정화(淨化)의 사상과 연결된 것도 교부들을 통하여서이다.

 

교회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두 관념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로서 나타나셨는데, 그 몸의 신랑이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두 관념은 모두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례를 특히 사랑과 일치의 전망 하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관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념과 비슷하게 무엇을 위하여 교회가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인류와의 일치를 실현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선택된 하느님과 공동체 간의 사랑의 계약을 실로 완성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신부와 몸 개념의 연결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고 교회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내재(內在)”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관념이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 아래 예속되어있고 그분께 순종하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그분 앞에 서 있으며, 그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 관념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이해와의 관련 하에 두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 관념,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내밀한 사랑과 교회의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 그리고 교회의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신부처럼 사랑하시어, 제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는 남편의 모범이 되셨으며(에페 5,25-28 참조), 바로 그 교회는 자기 머리에 순종한다.(에페 5,23-24 참조)” (교회헌장 7항)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다.(에페 5,25-26 참조)”(교회헌장 39항)

 

나아가 공의회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께 대한 교회의 관계도 강조하고 있다. ‘교회헌장’에 의하면 성령은 교회가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도록 이끄신다.(4항 참조) 그런데 교회는 지금 벌써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아직 그와의 결혼은 완전하지 않다. 성령을 통하여 혼인은 먼저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이루어졌지만, 그 혼인은 아직 세상 마지막 날의 완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라는 제목 하에서 먼저, “공의회 이전의 관점들”로 ‘corpus mysticum(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다음으로 “성령과 관련된 새로운 교회이해”로 ‘성사’와 ‘신비’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성령과 관련된 새로운 교회이해”의 계속으로 ‘친교로서의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월간 빛, 2004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5)

 

 

* 성서적인 이해 속에서의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이란 말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하느님의 백성은 계속하여 교회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교회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를 가리키는 ‘엑클레시아(ecclesia)’라는 단어 자체가 ‘백성의 모임 혹은 집회’를 뜻한다.

 

한편 바울로의 서간에서는 교회를 가리키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드물게 나온다.(로마 9,25-26; 2고린 6,16) 그렇지만 바울로는 교회를 자주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내는데, 그 자신의 근본적인 체험과 사명 그리고 교회 공동체 건설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러한 표현이 ‘성령의 성전’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교회를 규정하고 있다. 바울로에 의하면 교회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새로이 모아진 하느님의 백성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된다.(1데살 2,14)

 

새로이 모아진 하느님의 백성이 교회이기에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연속성 상에 있으며, 또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다. 즉 신약의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는 이스라엘의 계속이기도 하고, 새로운 백성으로서는 이스라엘과는 다른 백성이다.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성서적인 개념은 구약성서 안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신약성서 안에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겠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관념은 중세기에 점점 더 잊혀져 갔고 계속해서 교계제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념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가서야 바뀌게 되는데, 이에 지난 19세기 후반에 쇄신된 가톨릭의 교회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적만이 아니라) 신(神)중심적인 이 교회론은 교회를 구조와 조직만이 아니라 신비로 이해하였으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의회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고 있다. 즉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이해를 다시 의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2장의 제목이 벌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헌장 9)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이고 유일한 이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처음에 인간 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하나로 모으고자 하신 하느님 뜻의 계획(요한 11,52 참조)을 성취시켜야 한다.”(교회헌장 13)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원칙적으로 동등함을 의미하고 있다. 교회 구성원에 있어서의 동등한 권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표이기도 한데, “은총으로 결합되고 일치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관념이 모든 교회 구성원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존엄성을 나타내고 있다.(교회헌장 13 참조) 그래서 성직자들은 비록 그 직분의 성격상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 하더라도 교회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메시아 백성은 온 인류를 위하여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튼튼한 싹이다.(교회헌장 9 참조) 그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를 위하여 있는데, 성령께서 마치 ‘성전’에 계시듯 그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신다.(교회헌장 9)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관념이 공의회가 보여주는 교회론의 중심되는 관념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월간 빛, 2004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 · 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6)

 

 

*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느님의 백성’은 상호 보완적인 개념들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하느님의 옛 백성’과 (신약의) ‘하느님의 새 백성’ 사이의 특유의 차이점을 표현하고, 또 그것이 (교회라는) 종교적인 공동체의 새롭고도 결정적인 특성을 교회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념은 이렇게 서로 보충적으로 이해되는 개념들이지만 서로에 대해서 독립적인 개념들이기도 하다. 각 개념은 고유의 방법으로 교회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개념이 다른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교회이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종속된 교회이해라고 한다거나, 그 반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이해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에 종속된 교회이해라고 한다는 것도 다 너무 일방적인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개념은 특히 ‘성체성사’와 관련된 개념이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위해서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위해서도 성체성사는 똑같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언제나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 자신이 새로이 건설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체성사가 교회를 나타내는 개념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개념이 강조하는 것은 성체성사만으로는 분명하고 충분히 나타낼 수 없는 관점들인 것이며, 하느님 백성이라는 교회 개념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개념만으로는 명료하게 나타낼 수 없는 교회 특유의 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체험에 따르면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늘 새로이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시대를 걸쳐 함께 하신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에서도 유효한 것이며, 이제 (신약의 백성인) 교회 안에서 더 충분히 고려되어야 했다.

 

* 친교(communio, 콤무니오)

 

바울로는 ‘신자들의 친교’ 혹은 ‘공동체’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인  (코이노니아, 라틴어로는 communio, 콤무니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자들의 집회를 덧붙여 그리스도교적인 보화들인 ‘믿음’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1고린 10,16-17 참조)와 ‘성령’(2고린 13,13 참조)에 대한 공동의 참여를 표현한다. 거룩하고 보편적인(가톨릭) 교회는 4·5세기의 사도신경에서 성인들의 친교(혹은 공동체)로 나타난다. 공동체를 드러내는 이 ‘친교’ 개념은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심개념이다. 친교 개념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그것이 교계제도에 대한 잘못된 편중을 보완하는 개념이라는 데에 있다. 교회는 친교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교회의 이 친교적인 특성은 중세기 이후 다른 정의들로 인하여 배후로 물러났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금 새로이 공동의 교회적인 인식으로 두드러지는 것이다. 친교 개념의 구체적인 의미는 교회헌장 제2장의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목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교회는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공동체이고(교회헌장 8항 참조),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립되고 구원의 도구로 삼아진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친교이며(교회헌장 9항 참조), 교회적인 공동체이고(교회 15항 참조), 사제적인 공동체이다.(교회헌장 10, 11항 참조)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이다. 친교 없는 공동체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곧 친교를 가리키는 말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교회라 할 때, 이 교회는 일차적으로 친교의 공동체임을 뜻한다. 벌써 공동체를 가리키는 희랍어와 라틴어 단어 자체가 친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내 자신이 교회의 친교에 이바지 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교회의 친교를 깨는 사람이라면 교회 공동체를 깨는 사람인 것이고, 내가 교회의 친교에 나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친교의 사람인 것이다!

 

라. 친교의 원리가 되시는 성령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선사되어진 성령을 통하여 나누어진 신적인 ‘아가페(agape: 사랑)’가 된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친교의 원리’가 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므로,  곧 교회 안에 - 신적인 사랑을 부어넣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교회는 ‘거룩하게 된’ 곧 ‘성화된’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진 친교로 나타나는데, 이 친교는 그들이 (성사를 비롯한) 거룩한 것들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여기서 성령은 그 거룩한 것들의 한없는 원천이 되신다.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 사이의 사랑의 끈이신 성령은 또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공동체의 내적인 끈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친교에로의 최종적인 동인(動因)이시고 친교의 관리자이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성령은 친교와 봉사로 교회를 일치시키는 분이시다.(교회헌장 4항 참조)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가 성령 안에서 다른 이들과 친교를 이루는 것이다.”(교회헌장 13) 성령을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이 된다.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가득 채우시고 다스리시어 신자들의 저 놀라운 친교를 이루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합시키시어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시는 것이다.”(일치교령 2)

 

전통적인 교회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교회에 대한 오순절의 성령의 파견과는 잘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신자는 성령이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한 공동체에 속하는 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세주를 믿는 백성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신 백성을 혈육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교회헌장 9)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당신의 교회 안에서 실현하신다. “성령의 재촉을 받아 교회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 구원의 근원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도록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교회헌장 17)

 

마. 교회 공동체의 원천이고 모상인 ‘삼위일체적인 친교’

 

‘삼위일체적인 친교’라는 개념은 신적인 세 위격이 그들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하나의 신적인 생명을 완성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이 ‘삼위일체적인 친교’ 안에 자신의 근원을 두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전 삼위일체가 드러나는 곳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교회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거하시고 활동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세상과 친교를 맺으신다.

 

초대교회는 자신을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1요한 1,3ㄴ)로 이해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다.(교회헌장 4항 참조)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공동체 안에서의 인격적인 공동체로 예시되었고, 신적인 생명에의 참여 안에서 인간들의 공동체로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이고 유일한 이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처음에 인간 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하나로 모으고자 하신 하느님 뜻의 계획을(요한 11,52 참조) 성취시켜야 하는 것이다.”(교회헌장 13)

 

교회는 하느님이 시초부터 원하셨고, 이제 당신의 삼위일체적인 구속행위를 통하여 새롭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취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교회를 위한 근본적인 기초가 되고 모범이 되며 목적이 되신다.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신다. 그러기에 교회는 삼위일체적인 활동의 터전과 열매와 모범이 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삼위일체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이콘(icon, 성화)’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 교회에 근거와 형태와 방향과 규범을 주신다. 교회는 하느님의 한 백성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계시고 당신 활동으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성령, 즉 인간을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과의 일치 혹은 친교에로 결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공동체이다.

 

“성령께서는 세말 공동체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로, 더욱이 세말 이스라엘 자체를 비로소 참으로 이루어 내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묘사된다.(이사 32,15; 44,43; 에제 11,19; 36,26-27; 37,14; 요엘 3,1-2)” 성령께서는 교회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예수님의 현세적인 역사라는 좁은 시간적 영역을 넘어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교를 실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일찍이 삼위일체의 내재적 통교를 교회적인 통교와 연결시켰다. : “성부와 성자께서는 당신들께 공통적인 것으로 우리 가운데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우길 원하시고, 당신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저 선물, 즉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선물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일치에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신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을 통하여 기뻐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마도 성령께서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께도 똑같이 쓸 수 있는 이름을 당신의 이름으로 가지고 계신 듯 하다.” 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하느님 안에서의 꼼무니오(Communio, 친교)”로 이해하였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공동체라고 표현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다음 호부터는 “봉사하는 교회의 조력자로서의 성령”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월간 빛, 2004년 10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1,8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