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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8: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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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4 ㅣ No.401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8)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 (하)

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판적 성경 해석 제시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이란 비판적인 여성주의 사상가의 눈으로 성경 해석의 방법론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생각을 잘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세 가지 중심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용어는 각각 ‘wo/man,’ ‘의식화(conscientization),’ 그리고 ‘주인중심제(kyriarchy)’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익숙한 개념들이 전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생각해 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낯선 용어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용하곤 합니다.
 

중심용어 세 가지

첫째 용어인 wo/man 혹은 wo/men이라는 용어는 피오렌자 교수가 자신의 독자로 하여금 남성중심적 언어의 문제점을 의식하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용어(wo/men)는 어떤 형태로든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 남녀 모두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그런데, 피오렌자 교수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은 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을 wo/men이라는 용어에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초대받으며,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어떤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힘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피오렌자 교수가 지적하듯이 자신이 한 사회의 억압받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양자택일적 물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억압하는 자인 동시에 억압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억압자가 되고, 또 억압받는 자가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을 ‘의식화’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 용어는 제2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주인중심제(kyriarchy)’라는 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주님’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다스린다, 지배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를 결합해 만든 것입니다. 주인중심제란 소수의 엘리트 남성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배하는 사회정치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부장제라는 말이 젠더라는 생물학적 개념에 기초한 용어라면, 주인중심제는 지배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젠더는 사회적인 지위나 부와 함께 그런 지배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입니다. 피오렌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특권층에는 남성이 속하지만 억압받는 자에게는 양성 모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피오렌자 교수에게 있어서 wo/men과 주인중심제는 상호연관된 용어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여성주의(feminism)란 남녀 모두의 의식을 일깨워 그들을 묶고 있는 억압의 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녀 모두 성별을 떠나서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억압받고 있다면 그들이 억압받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단계는 매우 힘든 과정입니다. 나아가 소수의 엘리트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주인중심제는 그런 상황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라는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전통적 성경 해석은 이런 주인중심제를 천부적 체제로 여기게 하곤 하였습니다. 피오렌자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여성이 고통을 받아 왔는지를 지적합니다. 주인중심적인 억압의 체제가 정상적인 것도 상식적인 것도 아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해방을 위한 중요한 단계이며, 의식화 과정의 일부분이 된다고 피오렌자 교수는 말합니다.

자신이 속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하고, 또 다른 이들이 받고 있는 억압에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과 성경의 해석 역시 주인중심제의 지배구조를 옹호하고 있는지 혹은 저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기존의 학문적 성경 연구 분야도, 학자들이나 사목자들, 평신도들이 하는 성경 본문의 해석도 모두 다 주인중심제의 패턴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여성신학자들은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아예 성경을 포기합니다. 성경 본문 자체가 이미 남성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을 포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 연구나 성경의 해석을 그런 패턴에 맡겨두는 것 역시 무책임한 것이라고 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말씀들을 자신의 영적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들조차도 기존의 성경 해석 방법이 미치는 결과들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수정하기 위하여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자’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자’란 성경 본문 자체와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이 내재적으로 주인중심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더 근원적인 민주주의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입니다. 이런 해석자들을 통하여 여성에 대한 지배를 옹호하는 성경 해석에서부터 여성이 그런 지배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는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를 위하여 다음 일곱 가지의 해석학적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① 경험을 사회적으로 정의하는 경험의 해석학, ② 지배의 해석학, ③ 의심의 해석학, ④ 평가의 해석학, ⑤ 재상상력의 해석학, ⑥ 재구성의 해석학, ⑦ 변화와 개혁의 해석학.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의심의 해석학은 남성중심적이고 주인중심적인 본문과 그에 대한 해석이 주인지배적인 억압을 유지하기 위하여 활용한 방법들을 연구합니다. 이와 반대로 욕망의 해석학, 혹은 재상상력의 해석학은 의심의 해석학이 밝혀낸 지배와 착취, 소외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담론을 만들어 내고 해방을 위한 비전을 만드는 것을 추구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런 비전의 한 예로 ‘여성-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보통 ‘교회’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충분한 시민 자격을 갖춘 완전한 시민들의 민주적인 회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피오렌자의 ‘여성-에클레시아’라는 말에는 모두가 평등하며, 의사결정 과정에 충분히 참여하는 근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여기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 이유는 여성들만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교회(에클레시아)에서 여성들이 소외되었고, 결정권 대부분이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혜-소피아의 집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미지들 안에서도 주인중심적 지배 체제가 반영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성경의 언어 자체가 남성중심적 체제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남성으로 지칭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에서는 하느님을 남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성들의 억압을 영속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오렌자 교수는 먼저 신을 표현하는 인간 언어의 부적절성과 어려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느님을 G*d로 표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지혜-소피아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지혜-소피아로서의 신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지만 다양한 신개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진 개념이기도 합니다. 마치 지혜가 일곱 기둥으로 집을 짓고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듯이 피오렌자 교수는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을 실천해보도록 지혜-소피아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 배움의 집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와 무관하게 영적 성장과 사회적 참여의 기회를 균등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학자로서의 전 삶을 이 집에 이르는 길을 만드는 데 바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지혜-소피아의 일꾼이 되어 그 집 문간에 서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6월 15일, 
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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