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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사해 부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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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106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사해 부근에서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그날의 복음 말씀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문득 「사해 부근에서」에 나오는 예수님이 떠올랐다. 정말 무력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예수님, 기적을 행할 수 없어 마냥 슬프기만 하던 그 예수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신 것이다. 그렇구나! 그 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위한 예수님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우리 곁에 언제까지나 함께 계시겠다고,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하신 예수님 생각에 또 한 번 머물게 되었다. 「사해 부근에서」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한번 그 사람의 인생을 스쳐 지나가면 그 사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들이 종교와 신앙이라는 대명제를 인간의 약함과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소설을 처음 읽는 사람이 가지는 불편한 느낌은 공통적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뒤집어서 보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읽다 보면 어느새 그가 펼쳐놓은 새롭게 보는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끝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다보면 그리 나쁠 것은 없다. 이 책을 가지고 여러 번 독서 포럼을 하게 되었는데 다양하게 반응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작가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반응이 아닐까 싶었다. 열린 관점이랄까? 열린 시선이랄까? 성경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이들은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어 이 책이 불편하고, 그의 소설의 특징 중의 하나인 꼭 비겁하고 나약한 이들을 정면에 내세워 그 인간을 외면하고 싶지만 어딘지 나와 닮은 그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불편한데, 그럼에도 독자들에게 고민에 가까운 사색거리를 한 아름 안겨준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작가가 매료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서서히 깊이 매료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작가)의 인생에서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규정짓고 싶어 하는 작가의 예루살렘 순례로 시작되는 「사해 부근에서」는 세 가지 시점이 나온다. 종전 후 20년이 지난 현재로, 그가 전쟁 때 가톨릭계 대학의 같은 기숙학생이었던 도다를 만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수의 족적을 더듬으며 역사 안에 예수를 만나고자 한다. 도다는 그 당시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꽤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점은 전쟁 중 기숙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삶을 회고하면서 예수회 수사 신부들과 전쟁의 상황, 종교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의 시점은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만났던 인생들을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여섯 명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수는 고향에서 조용하게 목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떠나와 척박하고 황량한 황야 가까운 곳에서, 갈릴래아의 가난이 찌든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기적의 메시아가 첫 번째 파도였다면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는 예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두 번째 파도였다. 그런데 ‘군중 속의 한 사람’이었던 열병을 앓던 알패오는 그가 만난 예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갈릴래아 호숫가, 갈대가 무성하고 바람도 무시로 불어대는 빈 오두막에 가족들은 그를 버려두고 갔다. 행여 병이라도 옮을까 하여 먹을 것도 멀찌감치 놓고 사라지면 그는 홀로 열에 들뜨고 외로움에 사무쳐 죽음이 엄습하는 고통을 맞이해야 했다. 극도의 고통이었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알패오의 곁을 지켰다.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의 끝에는 그가 있었다. “내가 곁에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는 병을 낫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한없이 슬픈 눈으로 바라봐주고 함께 있어주기만 하였는데도 버림받았다는 씁쓸한 느낌을 단번에 상쇄시켜주었다. 그의 슬픈 눈은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군중 속의 또 한 사람인 빌라도도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다만 사람들의 슬픈 인생을 지켜보고 그것을 사랑하려 했을 뿐입니다.”

전쟁 중에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독일계통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쥐’라고 학생들 사이에 불렸던 코바르스키 수사는 폴란드 출신의 유다인이었다. 그가 볼품없는 외모와 비겁함, 그리고 나약함 등 결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인간이었지만 주인공은 끊임없이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죽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행하는 온갖 비열한 일들에 대해서도 듣게 된다. 그럼에도 쥐는 죽음의 가스실로 가는 도중 극도의 공포감으로 비틀거리며 오줌을 싸며 걸어갔다고 한다. 수용소에 같이 있었던 사람은 “그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오른쪽에 누군가 또 한 사람이 그처럼 비틀거리면서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 것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증언한다. 그의 옆에 똑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는 예수라는 그 사나이가 ‘쥐’에게도 당신 운명을 허락하신 그것을 보면서 주인공은 비로소 인정하고 고백한다. 무력했던 예수, 살아있을 때 아무런 기적도 할 수 없었던 예수가 죽은 후 기적처럼 제자들이 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전부 바쳐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가 생전에 이루던 일을 계속하면서 예수를 전하고 또 전했는지,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코바르스키 수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이 중첩되면서 마지막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군중 속의 그 사람들을 따라다녔고, 쥐의 인생을 따라다녔고, 자신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예수는 ‘내가 예수를 버리려 했을 때도 예수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면서’ 언제까지나 함께 하셨다는 것을 황량하고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사해 부근에서’ 작가가 만난 앎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을 따라다니시는 예수님도 그 예수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희망과 위로를 주는지, 그 어느 때보다 슬프고 아픈 고단한 인생들이 많은 이 시대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월간빛, 2012년 4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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