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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36: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창세기 강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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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65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6)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창세기 강해’에서

 

 

단식의 참된 의미

 

[본문]

 

“음식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식하여 배가 터질 지경에 이르도록 먹었다면, 식탐은 해로운 것입니다. 더욱이 식탐은 음식에 대한 즐거움까지 없애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술을 적당히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주망태가 되거나 그로 인한 무절제한 행동으로 영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허약해서 (사순 시기에) 음식을 먹지 않고는 하루도 지낼 수 없는 경우,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것 때문에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하시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의 능력에 벗어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음식 자체를 위하여 우리에게 음식을 절제하라거나 단식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파묻혀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그 한가해진 시간을 영적인 일에 쓰게 하려고 이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을 깨어 있게 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영적인 일에 쓰며, 식욕을 만족시킬 만큼만 음식을 먹고, 선행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운다면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확실히 갈대와 같아서, 쾌락과 기분을 돋우는 일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애정이 깊으신 아버지이시며 우리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통치자께서 우리가 육욕을 멀리하고, 일상에서 오는 걱정을 영적인 일로 승화시키려고 단식이라는 약을 생각해 내셨습니다.

 

음식에 대한 절제뿐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신뢰받을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식할 수 없는 사람은 음식을 먹는 대신에 가난한 이들을 돕고 기도를 바쳐야 하며 거룩한 말씀을 듣는 데 열심해야 합니다. 

 

몸이 허약해도 이런 일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원수진 사람과 화해하고 복수심을 없애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한 사람은 우리 통치자께서 모두에게 요구하신 참된 단식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을 만족시키기보다 거룩한 계명을 기꺼이 지키라는 바로 이 한 가지 이유에서 음식을 절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창세기 강해’ 10.

 

 

“단식은 참회와 정화의 수단”

 

[해설]

 

제의적 단식은 유다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 이교에서도 흔히 행해졌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배반당한 날인 수요일과 십자가에 처형된 날인 금요일에 단식하였다(‘디다케’ 8, 1). 단식은 3세기부터 의무화하기 시작하여 사람들은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

 

오늘날 단식의 의미

 

오늘날에도 교회가 정한 날에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큰 어려움 없이 한 끼의 식사를 거른 채 생활할 수 있으며,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아도 각자가 더 좋아하는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정한 금식재와 금육재가 그리 큰 의미를 지닐 수 없는 시대에 단식에 관한 교부들의 글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레오 교황은 “사실 우리가 하는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레오 교황 ‘사순시기 제4강론’ 2)라고 말하면서 단식의 참된 의미를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악과의 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단식하면서 “노여움에 사로잡혀 하루를 보낸다면, 그러한 단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질책한다(‘에우스토키움에게 보낸 편지’ 22, 37). 단식은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내쫓고 죄를 극복하는 무기로 죄에 대한 참회와 마음의 정화 수단이었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단식의 실천으로 절약하여 남은 것은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바라시고 좋아하시는 단식이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고 반문하신다. 

 

단식의 실천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이웃을 만나는 구체적 행위였다. 또한 단식은 자신의 삶을 영적으로 살고자 하는 선택이며, 인간의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곧, 단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생활 방식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끝으로 오늘날 제기될 수 있는 문제도 지적해보자. 교회의 규정에 따라 시기와 날짜를 정하여 단식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형식적 틀 안에서 지키는 것은 강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반복되면서 타성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단식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적으로 진보시키고 하느님 앞에서 고유한 한 인격체로 머물기 위해 단식을 일상화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위의 글에서 단식의 다양성을 내세우듯이 자신이 절제하기 어려운 것을 절제함으로써 단식을 영적인 일로 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신문, 2005년 12월 11일,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 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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