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수도 ㅣ 봉헌생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50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1 ㅣ No.393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50돌 (상)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사랑 실천하며 선교에 매진


과달루페 외방선교회(Guadalupe Missioners: M.G.).
 
1531년 멕시코 테페약 산에서 발현한 과달루페 성모(Virgen de Guadalupe)를 본받아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에 일생을 바치고자 1949년에 설립된 외방선교회로, 올해 한국 파견 50주년을 맞는다.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한국 파견 50주년 기념 상징마크 및 로고.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한국지부(지부장 유진호 신부)는 오는 5월 12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자양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5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남 순천시 금당성당에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각각 한국 파견 5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기념식과 축하연을 갖는다.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를 시작으로 192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 1933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이어 맨 마지막으로 이 땅에 파견된 '막내' 외방선교회로 50돌을 맞은 과달루페회가 한국 복음화를 꿈꾸며 걸어온 선교 여정과 발자취를 두 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과달루페 성모께 전구를 청하며

1962년 2월 5일. 과달루페 성모가 발현한 테페약 산 정상에 세워진 과달루페 대성당에선 선교사 파견 및 환송예식이 거행됐다. 호세 알바레스 헤레라(안요셉) 신부와 호세 차베스 칼데론(강요셉) 신부가 주인공이었다. 참석자들은 과달루페회 사상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파견되는 두 선교사에게 하느님께서 함께하기를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과달루페 성모 상본.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가 과달루페회 초대총장 에스칼란테 주교를 만나 파견을 요청한 게 계기였다. 이에 앞서 1961년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멕시코를 방문, 과달루페 선교사를 부산대목구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 것도 과달루페회가 한국 선교를 하게 된 단초가 됐다.

이들은 '과달루페의 평생 동정 마리아'로 불리기를 원했던 과달루페 성모께 전구를 청하며 기나긴 선교 장도를 떠났고, 10개월 뒤 미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딛는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참조)는 선교 모토를 세운 과달루페회가 설립된 지 13년 만에 한국 선교의 포문을 연 것이다.

'뱀을 부순 여인'이라는 뜻의 과달루페 성모를 본받아 일생을 선교에 바치겠다고 서약한 두 선교사는 우리말을 익힌 뒤 1963년 9월 여수로 파견된다. 안요셉 신부와 강요셉 신부는 각각 여수 동산동본당과 서교동본당에 부임, 보좌로 사목의 첫발을 내딛는다. 모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사목을 맡고 있던 본당들이다. 두 신부는 훗날 두 본당을 인계받아 선교를 본격화한다. 이들의 여수 선교지 파견은 그에 앞서 방한한 에스칼란테 주교가 헨리 대주교와 선교사 파견에 관한 약정을 체결하고 한 달 뒤 교황청 공식 승인을 얻어 여수ㆍ순천은 물론 인근 지역 본당 설립과 사목을 맡게 되면서 이뤄졌다.
 
- 과달루페회 1,2차 선교단으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제들이 1964년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자립하면 또 다른 선교지로

과달루페 선교사들은 선교지가 신자 수나 영성적, 경제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자립하면 본당을 교구에 이관하고 또 다른 선교지로 떠나 다시 새 본당이나 공소 사목을 맡아 선교영역을 넓혀나갔다.
 
1963년 여수를 시작으로 이듬해 3월 새 선교사 5명이 입국, 광주에 도착하면서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과달루페회 사상 첫 신학생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민호(프란치스코) 신부도 1963년 4월 합류해 광양공소에서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며 환자 방문과 함께 선교에 들어갔다.
 
당시 헨리 대주교는 여수ㆍ순천 지역에 교구를 설립할 작정으로 과달루페 선교사 루돌프 나바로 신부를 총대리로 임명, 여수와 순천ㆍ곡성ㆍ벌교ㆍ보성ㆍ소록도 지역 사목과 선교를 맡도록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터여서 성당 신축은 꿈도 꾸지 못하던 때라 과달루페회는 여수ㆍ순천 지역 성당 신축에 노심초사했다. 멕시코 과달루페회 신학생들은 주일이나 방학 때면 여러 지역 본당에 파견돼 해외 선교지의 열악한 사정을 설명하며 후원금을 모금해 국내 성당 신축에 도움을 줬다.

1963년 한국을 찾은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뒷줄 오른쪽) 주교가 새로운 선교지로 선정한 여수ㆍ순천 시내를 걸으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1965년 10월 순천 저전동본당에 부임한 강요셉 신부는 현지에 과달루페회 한국지부를 두고 본당이 한 곳밖에 없던 순천에 새 본당을 설립한다. 1969년 순천시 조곡동에 부지를 매입, 이듬해 성당을 완공했다. 현재의 조곡동성당으로, 과달루페회가 한국에 파견된 이후 신축한 첫 번째 성당이었다.
 
소록도본당 사목 또한 과달루페회 한국지부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65년 민호 신부가 소록도본당 보좌로 부임, 3년 뒤 주임으로 임명된 이후 30여 년간 과달루페회는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며 소록도본당이 현재 모습을 갖추기까지 헌신했다.

과달루페회는 1966년 화재로 소실된 동산동본당 유치원을 재건축했고, 1968년엔 벌교본당 과역공소를, 1969년엔 저전동본당 서면공소를 각각 신축했다. 1970년엔 구례공소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고 구례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여수ㆍ순천 지역 뿐 아니라 1964년엔 서울대교구 성수동지역을 맡아 사목하다가 1981년 교구로 인계했고, 1977년엔 자양동본당을 설립해 지금까지 사목하고 있다. 1974년엔 부산교구 양산본당에서 사목했으며, 1978년엔 부산교구 사직동본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인천교구에선 원헥톨 신부가 1990년대 중ㆍ후반 대부도본당과 영종본당을 중심으로 사목했다.


여수, 순천 새 교구 설립 꿈 무산

1984년 한국을 방문, 103위 복자를 시성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록도를 찾아 소록도본당 주임 남영선 요셉 신부와 만나고 있다.
 

여수ㆍ순천 새 교구 설립이라는 과달루페회의 꿈은 10년 만에 무산된다. 1972년 교황청 결정으로 새로운 교구 설립이 무산됨에 따라 여수ㆍ순천지역 총대리 역할을 맡고 있던 루돌프 나바로 신부는 총대리직에서 물러나고, 과달루페회는 광주대교구 소속으로 선교활동을 새롭게 시작한다.

그럼에도 회원들 선교활동은 날이 갈수록 확대됐다. 고요셉 신부는 선교 불모지 도화에서 우체국 관사를 빌려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도화공소(당시 고흥본당 소속, 현 도화본당)를 설립했고, 1976년엔 공소 교육관을, 1979년엔 도화공소를 신축하기에 이른다. 1974년 구리카르도 신부가 매곡동성당 부지를 매입, 성당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설정된 지 6개월 만에 새 성전을 완공했다.
 
1980년 이마누엘 신부가 증축한 녹동공소는 녹동본당으로 승격됐다. 노요셉 신부는 서교동본당 쌍봉공소를 맡아 공소사목을 하던 중 1981년 선원동본당으로 승격되면서 본당 사목을 맡았고 1995년 성당 신축 이후 교구에 이관했다. 1998년엔 순천 신도시 지역에 금당(구 해룡)본당 사목을 맡아 2004년 새 성전을 신축했다.
 
과달루페회는 그간 5개 교구 27개 본당에서 사목했으나 대부분 교구에 이관하고, 현재 서울대교구 1곳ㆍ광주대교구 3곳 등 모두 4개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1980년대 이후엔 본당 설립이나 신축보다는 본당 사목을 중심으로 선교에 치중했다. 또한 한국 신자들 사이에 과달루페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과달루페 성모 성지 순례 안내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22일, 오세택 기자]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50돌 (하)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 찾아가 하느님 사랑 선포


2009년 6월 5일. 광주 양동시장에 '공소'가 들어섰다. 호남의 대표적 전통시장으로 꼽히는 양동시장 상인들과 전남대 학생들 사목을 위해서였다. 시장 안에 공소가 들어서자 당시 교구 총대리이던 김희중 주교(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도 당일 축복식을 주례하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담당 사제는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선교사 안재윤(안토니오) 신부로, 시장사목을 위한 공소 설립은 과달루페회 한국지부장 유진호(에우제니오) 신부의 청원에 따른 것이었다.

- 2010 정기총회를 마치고 순천 본부에서 함께한 과달루페회 한국지부 선교사들.


외국인 사제의 느닷없는(?) 출현에 의아해하던 시장 상인들은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매주 찾아오는 안 신부의 열의에 감동을 받았다. 일부 신자들을 중심으로 소공동체 모임이 생겨나고, 이듬해엔 사목회를 결성했다. 2011년 2월엔 새 영세자도 배출한다.

또한 대학생 선교에도 눈을 돌려 전남대는 물론 서울대와 한국외국어대, 가톨릭대 등에서 남일오(라미로) 신부와 유상화(프란치스코) 신부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있다.

교구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그간 '본당사목' 위주로 선교활동을 해오던 과달루페회는 이처럼 시장이나 대학 등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나섰다. 이를 위해 2010년 6월엔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를 재단법인 체제로 전환, 독립 수도단체로 인가받았고, 본당사목뿐 아니라 교육활동과 대학생 사목, 피정지도, 병원사목 등 특수사목에 힘을 쏟고 있다.


순천 성가롤로병원 설립 산파역

그렇다고 해서 과달루페회 특수사목이 최근에 시작된 것만은 아니다. 과달루페회 병원 사목은 이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순천 성가롤로병원 설립은 과달루페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965년, 독일 가롤로 보르메오 수녀회가 한국에 분원 설립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과달루페회 남요셉(나바로) 신부는 변변한 의료시설 하나 없던 순천에 병원을 설립하고자 순천시 장천동에 병원 부지를 매입하고 수녀회에 기증할 의사를 내비친다. 수녀회는 그 뜻을 받아들여 1969년 11월 의료 불모지 순천에 병원을 설립한다. 성가롤로병원의 출발이었다. 병원은 1996년 종합병원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98년 새 병원을 신축, 순천시 순광로 221(조례동 1742)로 이전했다. 병원 운영권도 1974년 가롤로 보르메오 수녀회가 철수하면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로 이양됐다.

- 2004년 10월 서강대 한국어학당 축제에서 멕시코 전통 의상으로 한껏 뽐낸 과달루페회원 고 리고 신학생과 페르민 신학생이 공연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병원 설립의 산파 역을 맡았던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은 43년째 여전히 의료선교현장을 지키면서 변함없이 원목활동을 하고 있고, 지금은 도정익(가브리엘) 신부가 원목사제로 있다. 또한 서울대교구에선 우진수(이냐시오) 신부가 중앙병원에서 원목신부로 선교하고 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 우선 선택

과달루페회는 본당사목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보이지 않게'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했다. 그 활동은 소외되고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서 경제 분야 사목까지 두루 망라한다.

꾸르실료 도입이 그 한 예다. 1967년 5월 서울대교구 성수동성당에서 영어로 진행된 한국 최초 꾸르실료엔 과달루페회 루이스 산체스 신부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에드워드 리처드슨 신부와 함께 지도신부와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물론 꾸르실료 운동은 케빈 오도넬 주한평화봉사단장이 1966년 9월 혜화동본당 신자이던 이해남 한양대 교수 등과 접촉해 꾸르실료를 소개한 데서 비롯돼 필리핀 가톨릭교회 꾸르실료 지도팀이 이듬해 내한함으로써 성사됐지만, 당시 성수동 지역을 사목하던 과달루페회의 전폭적 지원이 꾸르실료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로써 사제 4명과 남성 신자 17명 등 21명으로 이뤄진 첫 꾸르실리스따가 탄생했고, 이를 시작으로 한국교회에 꾸르실료 교육이 급속히 전파됐다.

과달루페회 선교사들은 협동조합운동에도 깊은 사목적 관심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신자들 경제사정이 어려웠기에 가난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선교활동과 성전 신축에 함께하는 신자들의 가정 형편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자들 살림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순천 저전동본당 주임 강요셉 신부는 1971년 당시 본당 내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시중에 은행이 많지 않아 소액을 저축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조금씩이나마 저축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다. 이를 모범으로 이요한 신부도 곡성본당에 신협을 설립해 신자들 가정 형편이 나아지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1969년부터 '조기 선교 체험'

과달루페회는 신학생 때 미리 선교지로 유학을 보내는 '조기 선교 체험'을 통해 성소를 확고히 해왔다. 선교지 언어와 풍습, 문화 전반을 미리 익히게 하려는 과달루페회 본부의 시도는 1969년 한국에서도 이뤄졌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지 불과 7년 만의 일이었고, 과달루페회의 첫 파견지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다.

- 전남 순천시 연향동 1624의5에 건립된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한국지부 본원 건물.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신학생들은 추규응(가브리엘) 신부와 우진수(이냐시오) 신부 등으로, 이들은 의사소통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와 가톨릭대를 거쳐 광주가톨릭대로 편입해 국내 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리고서 멕시코로 돌아가 사제품을 받은 뒤 다시 선교사제로 한국에 파견돼 광주대교구 등 여러 교구 본당에서 사목했다. 광주대교구에서 사목하다가 과달루페회 본부 후원회 일을 맡고 있던 추 신부는 지난해 8월 선종했고, 2010년까지 성가롤로병원 사목을 하던 우 신부는 현재 서울대교구에서 중앙병원 원목으로 활약하고 있다.

과달루페회는 오늘까지도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활동을 체험하도록 2~3년에 한 차례씩 광주가톨릭대에 편입시켜 5~6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부제품을 받은 뒤 멕시코로 돌아가 사제품을 받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 파견돼 있는 선교사제들 가운데 과달루페회 한국지부장으로 있는 유진호 신부를 비롯해 광주대교구 순천 금당본당 주임 마요한(요한 세례자) 신부와 무안 망운본당 주임 임재민(벤야민) 신부, 순천 상사본당 주임 강성현(그리셀도) 신부, 서울대교구 자양동본당 주임 양진홍(제라르도) 신부 등이 모두 광주가톨릭대에서 공부한 선교사제들이다.

교수신부도 신학교에 보내 신학생 지도에 한 몫을 했다. 1977년 광주가톨릭대 구약학 교수로 임명된 한조룡(헤시키오) 신부는 누구에게나 늘 "오케이"라고 말해 '오까 신부'로 불리며 신학생들은 물론 교구신부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엔 원헥톨 신부가 74살의 고령에도 광주가톨릭대 영성지도 신부로 재임하면서 젊은 신학생들과 함께 성소를 키워나가고 있다.


동북아 선교지 바라보며 새 도약

이제 한국 파견 100년을 내다보며 희년, 기쁨의 해를 맞고 있는 멕시코 유일의 외방 선교회인 과달루페회는 우리나라는 물론 동북아 선교지를 바라보며 새로운 도약대에 서 있다. 일본, 한국, 홍콩에 진출한데 이어 2005년부터 중국 창춘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 창춘에 파견돼 있는 선교사제 3명을 포함해 총 21명의 한국지부 회원들은 한 마음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유진호 지부장신부는 "일단 특수사목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어떻게 어떤 사목분야에서 활동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면서도 "온 세상에 복음 전파를 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자신의 성화를 이룩한다는 과달루페 선교사들의 정신은 변함이 없는 만큼 그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29일, 오세택 기자, 사진제공=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3,91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