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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70: 레이먼드 브라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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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09 ㅣ No.43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0) 레이먼드 브라운 (상)

교회 일치와 신약 성경(요한) 연구의 권위자



젊은 시절의 레이먼드 브라운. 미국 최고의 가톨릭 성경 학자로 인정 받는 그는 신약성경 연구 가운데서도 요한계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레이먼드 E. 브라운(Raymond Edward Brown, S.S, 1928~1998)은 성경 연구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가 1998년 8월 8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일생을 마감했을 때 타임스지는 그를 “미국 최고의 가톨릭 성경학자”로 칭송했다. 그의 죽음은 교회 일치와 신약성경 연구, 특별히 요한계 연구에서 큰 손실이었다. 그는 가톨릭 성경협회, 성경문학회, 신약성경연구회라는 세 단체의 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전 세계 개신교와 가톨릭계 대학으로부터 30여 개에 달하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학술원과 미국인물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7권의 책, 200편의 소논문, 108개의 책 논평들이 그의 펜에서 흘러나왔다. 브라운에 대해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의 생애와 업적, 특히 요한 공동체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알아보겠다.


생애와 활동

그는 1928년 5월 22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1953년 5월 23일 플로리다 어거스틴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성경 공부와 미래 사제들의 양성에 매료돼 1955년 술피스회 정회원이 된다. (그의 이름 뒤에 붙는 S.S는 술피스회[ Society of St. Sulpice]의 약자다). 술피스회는 수도회가 아니고 1641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교구 사제들의 공동체로서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들의 교육과 교구 사제들의 지속적 양성이라는 특별한 사도직에 봉사하는 단체다. 그는 미국 성 마리아 신학교(1791년 술피스회가 설립)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신학 과정을 계속하여 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는다(1953).

브라운은 팔레스틴 성경 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 밑에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근동 고고학과 연결해 연구하면서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1958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후에 브라운은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초청 교수로 가르치기도 했다(197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주교의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과 요르단에서 피츠마이어를 비롯한 동료들과 고고학 문서에 대한 자료집을 만들기도 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후에 브라운은 모교인 성 마리아 신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수 계약이 끝났을 때(1971~1974) 그는 은퇴할 때까지 개신교 신학교인 유니온에서 가르쳤다. 은퇴 후 술피스회가 운영하는 성 패트릭 신학교에서 연구와 출간 활동을 하다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술피스회 공동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1. 분도출판사가 펴낸 레이몬드 브라운의 저서 「신약성서 그리스도론 입문」. 2「신약개론」은 신약성경 각 권의 신학적 논쟁을 잘 정리돼있어 전문가와 학생 모두에게 필독 도서로 꼽힌다. 국내에서 레이몬드 브라운의 책은 대부분 개신교에서 번역되고 있다. 3.4 요한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브라운의 요한 복음 주석서


성경연구에 공헌


많은 사람들은 브라운이 어떻게 성경 연구에 매료됐고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의아해 한다. 그는 신학생으로서 로마에 유학 갔다가 한국전쟁 때문에 1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에는 교과 과정이 엄격했고 로마와 미국의 교육 체계가 달랐다. 미국에 오니 성경 입문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것이 돼 시험으로 대신해야 했다. 브라운은 먼저 구약성경을 읽고, 영어뿐만 아니라 불어, 이탈리아어, 독어로 된 참고 서적을 읽고 공부했다. 결국, 그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당시 그의 교수는 그에게 “그렇게 많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면서 그가 성경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교수에게 “성경은 제가 일생 해야 할 가장 관심 있는 것이다. 아주 매력적”이라며 앞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싶은 바람을 내비쳤다. 교수는 “우리에겐 성경을 가르칠 선생들이 필요하다”고 말해줬고, 그 후 브라운은 성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가 학문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비오 12세 교황의 혁명적 회칙 「성령의 영감」(1943)이 미국 가톨릭 교회에 깊이 침투했고, 또 하나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쿰란의 사해 문서 발견(1947)이었다. 이 두 사건은 20세기 성경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브라운에게도 성경 연구의 방향을 잡게 해줬다.

비오 12세 교황은 대부분 사람이 성경 해석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성경 연구를 촉구하는 「성령의 영감」 회칙을 발표한 것이다. 회칙은 성경을 라틴 불가타보다는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를 번역해야 한다면서 성경 해석의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끌어내기 위해 문학 형식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라고 했다.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가 하느님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교회 교부들과 중세 해석자들에게 일반적이었던 근본주의적 해석을 깨는 것을 의미했다. 이 회칙의 영향으로 브라운은 성경 해석 방법 중 역사 비평 방법의 뛰어난 변호자가 됐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들을 역사 비평 방법으로 주석했고, 많은 저서에서 그 방법을 적용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성경의 보다 풍부한 의미」(The Sensus Plenior of Sacred Scripture)]였는데 ‘보다 풍부한 의미’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의 많은 저서 중 「요한복음 주석서」(1966, 1970), 「메시아의 탄생」(1977), 「요한서간 주석서」(1982), 「성서에 대한 101가지 질문과 응답」(1991)」「메시아의 죽음」(1994),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1994),「요한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1979), 「신약개론」(1997), 「복음사가 요한과 함께하는 피정」(1998), 「요한복음 개론」(2003) 등이 유명하다.

「신약개론」은 신약성경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와 성경 각 권의 신학적 논쟁들을 잘 요약 정리해 주고 있어 전문가와 학생 모두에게 필수적인 책이다. 브라운은 「New American Bible」의 번역위원회 위원이었으며 「제롬 성경 주석」(1968, 1990)을 동료 학자들과 편찬했는데, 이는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신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브라운은 성서 해석을 언제나 교회에 대한 봉사로 염두에 두었으며 전례력에 따라 대림, 사순, 부활에 대한 소책자를 만들어 일반 독자들에게 성경의 이해를 도왔다.

그는 명확하고 통합적이며 모든 문제와 사람들에게 공정했다고 한다. 그는 술피스 신학교(1959~1971)와 뉴욕의 개신교 유니온 신학교(1971~1990)에서 가르쳤다. 가톨릭 학생들만 아니라 비가톨릭 신학도들도 뛰어난 스승에게 성경을 배우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그와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은 성경에 대한 그의 깊은 열정, 신약성경에 대한 사랑, 놀라운 기억력, 명확한 설명(불트만의 어려운 이론을 쉽게 설명했다고 한다), 유머 감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혜자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 1992년 종신서원 ▲ 2005년 로마 그레고리오대 졸업. 성서신학 박사(요한복음 전공) ▲ 현재 서강대 신학대학원 출강

[평화신문, 2014년 12월 7일, 이혜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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