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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거룩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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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07 ㅣ No.1609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거룩한 열정

 

 

열정의 회복을 위하여

 

나이가 들어가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열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정이 없습니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시간보다 견뎌내고 체념하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어도 열정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결과와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삶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고 사용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입니다(25장 14절-30절).

 

복음에는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개인의 자질과 능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이것을 세대에 따른 구별로 생각하며 묵상합니다. 청춘의 시기는 다섯 탈렌트의 시기이며, 중장년의 시기는 두 탈렌트의 시기이고, 노년의 시기는 한 탈렌트의 시기라고 말입니다. 젊은 날에 비하면 노년에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노년의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주님의 명령에 충실한 종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둔 어리석은 종처럼, 노년이 시간이라고 그저 체념하며 지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말입니다.

 

자기 생의 모든 시대는 그에 맞갖은 일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청춘의 일이, 중장년의 시절엔 또 그에 맞는 역할과 책임의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노년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 역시 열정을 갖고 수행해야 할 일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당신을 위한 봉사에 쓰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감화되어 우리의 모든 은사를 다른 위한 봉사에 내어놓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0항). 신앙인은 죽는 그날까지 복음화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청춘의 시기는 청춘의 방식으로, 중장년 시기는 또 그 나름의 방식으로, 노년의 시기는 또 다른 열정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 사명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바오로 성인과 함께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라고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130항). 거룩함은 복음화를 향한 열정에서 드러납니다. 성덕에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복음화의 열정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복음화의 열정은 신앙의 근본

 

복음화를 향한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발생합니다. 복음화의 열정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6항).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안에는 복음화의 열정이 가득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러 나섰을 때,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마르 16,20 참조). 이는 참된 만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136항). 만약 우리 안에 복음화의 열정이 없다면,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화를 향한 열정의 삶은 결국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와 생활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깊은 연민은 다른 이들에게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흔히 우리가 그러하듯, 망설이거나 소극적이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직접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설교하고 다른 이들을 치유와 해방의 사명으로 파견하는 그러한 연민이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1항)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밖으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복음화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입니다.

 

 

익숙함, 편안함, 타성, 안이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살다 보면 우리는 익숙한 것에 길들어 어떤 새로움이나 변화를 귀찮아 할 수 있습니다. “안이함은 매력적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는 언제나 어떻게든 살아남기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안이함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습관의 힘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악에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둡니다. 또는 다른 이들이 결정한 대로 그냥 놓아둡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7항). 삶의 타성은 늘 우리를 기존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게 합니다. 익숙하고 쉬운 방식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새로움과 변화를 거부하는 삶의 태도는 “개인주의, 심령주의, 폐쇄주의, 중독, 완고함, 수구주의, 교조주의, 복고주의, 비관주의, 원리주의”(134항) 같은 모습으로 변주되어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새로움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새로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늘 새롭게 출발하여 익숙한 것을 뛰어넘어 변방으로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기를 촉구하십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5항). 신앙인은 “무디고 따분한 평범함을 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열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관료나 직원이 아니라, 참된 삶을 나누는 데 열성을 쏟는 열정적인 선교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138항).

 

신앙인들이 새로움과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안이함으로 살아간다면, 그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억의 박물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139항). 거듭 강조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박제된 박물관의 삶이 아닙니다. 관료나 직원처럼 타성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화의 열정이 없는 삶은 죽은 신앙인의 삶입니다. 거룩함은 “이 세상에 표지를 남기는 복음화의 열정”으로 드러납니다(129항).

 

타성과 안이함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변화를 향한 열정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데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에게 오셔서 다시 한번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성령께서 사도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촉구하신 바로 그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봉사하게 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29항).

 

주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청년의 시절을 살든 중장년의 기간을 살든 노년의 계절을 살든, 그 모든 삶의 시간들 안에서 언제나 열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6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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