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44: 동정의 자비,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07 ㅣ No.1608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4) 동정의 자비,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자비와 동정심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뉴욕의 빈민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CNS 자료 사진]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14번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일에 열중하면서 자기 몸에 많은 극기와 고행을 행하지만,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삶의 목적은 존재의 원천을 공유하는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겪는 아픔과 궁핍함을 통해 다른 이들의 아픔과 궁핍함에 같은 마음을 지니는 법을 배웠다.

 

클라라 역시도 자신의 약점과 질병 안에서, 그리고 아프고 병약한 자매들을 돌보면서 자비와 동정심을 배워야만 했다. 클라라는 인간이 되는 것, 즉 자신의 피조물인 현실을 배워야 했다. 지나친 가난과 극기(특히 단식)를 살면서 클라라는 인간성을 배웠고 그 인간성의 체험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이 무쇠로 되어 있지도 않고’, 우리 ‘힘이 바위 같지도 않기에’ 아니 오히려 우리는 연약하고 온갖 육신의 나약함으로 기울어지기에, 사랑하는 자매여, 나는 그대가 무분별하고 불가능하게 재를 지켜 왔다고 알고 있는데, 지혜롭고 분별 있게 지나친 엄격함을 피하라고 주님 안에서 그대에게 부탁하고 요청하는 바입니다.”(38-40)

 

클라라는 가난과 극기의 삶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통해 오직 하느님만을 찾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침실의 벽돌 바닥이나 나무 위에 눕는 것보다 오히려 건초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주교에게 순종하여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어느 누가 이렇게 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그렇게 하셨다! 클라라의 삶에 있어 자신의 수난은 예수님의 수난이었다. 그녀는 그분이 그녀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삶 자체가 그녀의 교육자였던 것이다.

 

2014년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가 혼란에 빠졌고 여전히 이 상황과 관련해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특별히 희생된 이들의 가족과 친지, 친구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해의 일이다. 당시 필자가 알고 지내던 지인의 아들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겪고 있었던 심리적 어려움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 지인에게 아들이 단원고에 다니는지를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 역시도 그즈음에 영적, 심리적 혼란을 겪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생명을 살아가고 있다는 단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일찍이 맹자는 「공손추(公孫丑)」 상편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실천 도덕의 근본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있어 단서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이라고 했다. ‘인(仁)’에서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특히 근본이 되는 것을 주자(朱子)는 측은지심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주신 마음이며, 이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이웃의 일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내 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의 연결된 존재성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우리 마음 깊은 구석에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이 측은지심을 우리가 다시 끄집어낼 때이다. 왜냐하면, 이 측은지심이 바로 병자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지극히 깊은 동정의 자비이고, 이 자비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런 자비의 힘이 이미 부여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측은지심과 자비의 힘이 이 세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하는 사랑과 자비는 바로 이것이다. 십자가 상의 희생 제사와 성체성사 안의 희생 제사에서 바로 이 희생하는 사랑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일랜드에서 특히 사제들의 성체 신심 증진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베네딕도회의 한 사제에게 하신 말씀에서 당신께서는 이런 희생하는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6월 6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73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