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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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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5-13 ㅣ No.311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 … 박준양 신부 발표문 요약 (1)
주제 -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젊은이들 지적 욕구 · 영적 열망 교회가 깨달아야


4월24~26일 태국 삼프란의 방콕대교구 사목연수센터에서는 FABC(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가 주최하고 신학위원회가 주관하는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가 열렸다. ‘아시아에서의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열린 연수에는 FABC 신학위원회 상임 주교위원직을 맡고 있는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청소년 담당 및 서서울지역 교구장대리)와 한국대표 전문신학위원직을 담당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가 주최측 준비위원으로 참가했다.

박준양 신부는 4월 25일 오후 4시 30분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연수에는 30여 명의 각국 아시아 주교들과 FABC 신학위원들, 기타 패널 토론자, 봉사자등 총 50여 명이 참석했다. 본지는 박준양 신부의 발표 논문을 번역 요약, 두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비그리스도교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있는 아시아에서 오늘날 가장 중요한 책무는 바로 복음화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이들의 임무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권고 <아시아교회> 47항에서 젊은이들을 현대 복음화의 효과적인 역군으로 양성하기 위한 사목적 배려와 노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최근 아시아 각국 교회에서 젊은 층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는 커다란 위험 신호라 할 수 있다. 왜 그들은 교회를 떠나가는가? 우리는 그 주요 원인으로서 근본주의와 상대주의의 만연 현상을 들 수 있고, 이에 대한 신학적 분석과 사목적 대응이 필요하다 하겠다.

먼저 근본주의에 대해 살펴본다면, 지금까지는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종교적 근본주의, 즉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이제 새로 두 가지 범주에서 근본주의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종교적 근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반종교적(과학적) 근본주의이다.

한편으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진정한 종교적 가치가 아닌, 비판 대상에 대한 적개심과 공격적 성향을 보임으로써 젊은이들에게 종교와 신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사실상 무신론과 다를 바 없는 역효과를 자아낸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와 달리 현대 세계의 과학적 무신론이 종교적 근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을 가지고 종교와 신앙을 비판하는 흐름을 보게 된다. 전투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을 가리켜 학자들은 ‘과학적 근본주의’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근본주의나 과학적 근본주의의 공통점은 실재에 대한 편협하고 배타적 해석, 그에 입각한 공격적 성향이고, 이들 모두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남겨 그들이 교회를 등지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과학적 근본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화적 상대주의와 연결, 더 치명적 요소로 작용한다.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의 대표 인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를 들 수 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바탕으로, 다윈의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유사성을 복제자가 필요한 점이라고 설명한다. 생물학적 진화에서의 복제자가 유전자(gene)라면, 문화적 유전자에서의 복제자는 바로 밈(meme)이다. ‘밈’이란 단어는 모방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어간에서 따와 도킨스가 만든 용어이다. 마치 패션 감각이 하나의 ‘밈’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모방되고 전해지듯이, ‘신’이라는 개념도 뇌 사이를 뛰어다니며 전염되는 ‘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후 여러 책들이 발표되었고, 2006년에는 가장 센세이셔널한 저서 <만들어진 신>이 출간됐다. 여기에서 도킨스는 과학이 전통적 신학 영역을 대체해야 한다며, 신앙은 거짓된 믿음에 근거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그는 종교를 제거하면 세상은 훨씬 안전한 장소가 되며, 그리스도교는 거짓된 종교 현상의 대표적 경우라고 주장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도킨스만큼 전투적이지는 않다 해도, 2010년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매우 공격적인 무신론을 전개한다. 그는 철학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을 수 없기에 죽은 것이라고 말하며, 인생과 우주의 비밀에 관한 물음은 과학만이 대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생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과학은 우주의 신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뿐 아니라 “왜” 그러한 것인가까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급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이러한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주장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근본주의적 충돌과 갈등, 전쟁에 역겨움을 느낀 젊은이들에게 ‘종교는 악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한마디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며, 과학적 근본주의는 이러한 탈종교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과 그로 인한 근본주의적 흐름들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 속에서 교회는 어떤 신학적, 사목적 대응을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분석과 신학적 숙고를 통해, 과학적 근본주의의 맹점과 허상에 대해 잘 알게끔 젊은이들을 일깨워야 한다. 사실 과학적 근본주의자들이 표출하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다름없는 적개심과 미움 이상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선입견과 적대감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과학적 지식을 사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포장하고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과연 그들이 철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한 과학적 탐구의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신학과 과학은 우주의 기원과 인간 실존의 신비에 대한 진리 탐구적 열망의 동일한 샘에서 솟아나와 각자 다른 길에서 그 위대한 신비를 향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적 근본주의에 심취하여 교회를 떠나가는 젊은이들이 과연 어떤 모습들에 실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반론과 요구에 담겨 있는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지적인 욕구와 영적인 열망이 무엇인지를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근본주의에 대한 반론은 단순한 호교론적 맥락에서의 대응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진리 추구의 열망이 거룩한 신앙의 유산과 교회의 현재적 삶 안에서 계속 역동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증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아시아는 전통적인 종교문화적인 유산과 서구적 산업화 및 정보화의 큰 물결들이 만나 서로 교차되고 있는 격동의 장소이다. 철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전통적인 종교-문화적 가치,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흐름까지도 통합하는 균형 잡힌 신학적 전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우리 젊은이들이 종교 다원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전 속에서도 참된 그리스도 신앙의 역동적인 증인이 되게끔 인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아시아교회가 당면한 급박한 과제이다.


[인터뷰]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교회 안 청소년 문제 바라보는 이론 토대 마련”


“지난 1년간의 연구 노력을 통해 아시아 각 교회의 구체적인 사목적 비전 수립에 도움을 주게 된 점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또 아시아 교회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나누고 논의하는, 아시아 교회의 생생한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도 큰 기쁨을 느낍니다.”

FABC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에서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박준양 신부.

박 신부는 발표에서 특히 현대의 과학적 근본주의라는 새로운 흐름 그리고 문화적 상대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루면서 이 같은 제 상황들이 어떻게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결국 교회를 등지게끔 만드는지를 이론과 실제의 차원에서 설명, 각국 주교들을 비롯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 FABC 주최 신학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에서 박준양 신부가 발표를 하고 있다.


박 신부의 논문 발표는 연수 후 진행된 FABC 신학위원회 정례회의에서 분석된 참가주교단 설문 평가에서도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것으로 공식 발표됐다.

이번 논문 발표는 지난해 FABC 신학위원회 정례회의에서 추천됐다.

박 신부는 “1년 동안 주제에 대한 학문적 이론적 연구와 더불어 다양한 인터넷 리서치, 그리고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논문을 준비해 왔다”고 준비 과정을 설명했다.

“다른 발표자 3명이 모두 아시아를 대표하는 저명 신학자들이었던 면에서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젊은 신학생들과의 심도있는 대화를 병행하면서 2011년 2학기 대학원 과정에서 같은 주제의 세미나를 개설, 제자 신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같은 다각적인 시도가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근본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청소년사목 부분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어서 창의적인 신학적 사목적 비전을 제시해야 했던 작업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들려준 박 신부는 “이번 연구가 한국을 비롯 아시아 각국 교회 안에서 청소년사목의 문제들을 근본주의와 상대주의의 흐름 안에서 바라보는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게 됐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박 신부의 논문을 포함, 이번에 발표된 4개 논문은 모두 내용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FABC 중앙사무국을 통해 FABC 공식 문헌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6일, 이주연 기자]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 … 박준양 신부 발표문 요약 (2 · 끝)
주제 -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신앙 안에 이뤄지는 인격적 만남 필요한 젊은이들


- 4월 24~26일 태국 방콕대교구 사목연수센터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제4차 ‘주교들을 위한 신학연수’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FABC 신학위원회 상임 주교위원직을 맡고 있는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청소년 담당 및 서서울지역 교구장대리), 앞줄 맨 오른쪽이 한국대표 전문신학위원직을 담당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박 신부는 이번 연수에서 근본주의와 상대주의를 살펴보며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의 문제에 대해 발표했다.


최근 아시아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서는 젊은 층의 신자 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 보고가 이어진다. 이러한 종교-사회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서 상대주의의 만연을 지적할 수 있다.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세속주의, 물질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그리고 황금만능주의 등 반복음적인 풍조들이 널리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절대적인 신앙적·윤리적 가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교황으로 선출되기 이전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현대의 사회 환경 속에 만연해 있는 ‘상대주의의 독재’에 관해 이미 자주 언급해왔으며, 특히 세계청년대회(WYD) 등 젊은이들과 관련된 행사를 통해 이러한 언명이 많이 이루어졌다. 지역교회의 주교들과 사목자들 역시 상대주의에 물든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스마트폰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들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홍수에 마비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고 성찰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모두 상실해버린 것 같다.


상대주의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

상대주의를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고찰해볼 수 있겠다.

첫째, 철학적·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상대주의는 더 이상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사실상 사회적·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지식에 불과하기에 상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광범위한 사회 현상을 포괄하는 사회-문화적 에토스(ethos)로서의 상대주의를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culture of complacence), 그리고 정의에 관한 상대적 이해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기분과 느낌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의 상대주의에 해당한다.

첫 번째 관점에서 아시아 청소년들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시아의 다른 종교들로 떠나가는 일부 젊은이들의 현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종교전통들의 탄생지로서의 아시아에는 고유한 종교-문화적 풍부함이 있다. 이는 아시아교회가 갖는 고유한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정신문화적 풍부함 뒤에는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용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떠나 다른 아시아 종교에 대한 신봉자로 변화되는 경우들이 여러 지역교회에서 속출하고 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세례성사를 통해 태어나고 받아들여진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아시아교회의 특수성을 이해하여 타 종교들을 이해하며 그들과 대화하고 협력하여 사회적 평화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존 속에서도 고유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하는 조화로운 균형 감각과 통찰력이 아시아교회의 모든 구성원들, 특히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와 사목자, 신학자들에게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점, 즉 사회-문화적 풍조로서 아시아 청소년들에게 파고들고 있는 상대주의의 문제점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그들 부모 세대에 비하여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볼 수가 있다.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주된 관심사가 정의와 평화, 인간 존엄성과 권리에 관한 사회적 이슈였다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진부한 삶의 양식 안에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정의와 행복에 관한 매우 모호한 의식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경제적 위기와 낮은 취업률이 그들을 점점 더 제한되고 편협한 상대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순간적인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생명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외심도 하락해가고 있다. 이는 최근의 높은 자살률과 낙태 현상, 무분별한 생명공학적 연구 등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생명을 중시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등의 수백 년 간 지속된 아시아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은 이제 젊은이들에 의해 배격되고 있으며, 어른들은 이 성난 젊은 세대와 어찌 소통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도덕적 가치와 정의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에 종속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무엇이 옳은가?’는 이제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방향 잃은 외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들이 좋고 만족스러우며 안전하게 느끼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서 파생되는 그릇된 사회 풍조로서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학교 폭력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있겠다.

한 가지 구체적 예를 들어본다면, 이제 서구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가며 급속도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을 겪고 있는 아시아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돈이 전부라는 암묵적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음이 여러 통계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외모에 너무 집착하여 성형수술, 명품 가방, 보석과 패션 의류 등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표피적인 외적 아름다움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부와 힘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한 가정에서 하나의 아이만을 낳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이렇듯 개인의 아름다움과 부를 추구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더욱 드세어지고 물질만능주의의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사회적 공존과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더욱 약화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들은 힘들 때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상대주의적·물질주의적·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 황폐함과 내적인 좌절, 그리고 절망과 고통을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방황하는 젊은이 절망 읽어야

교회 안의 젊은이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적 에토스에 감염되어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젊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른바 ‘쿨’(cool)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정의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한 분이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할 것이다.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믿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특별히 인격적인 차원에서 통합되고 내면화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모든 교회 내 활동이 과연 얼마나 자신에게 좋고 만족스럽게 느껴지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친교에는 분명 긍정적 측면이 있고, 그것이 청소년사목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교회 내 젊은이들의 친교에는 뭔가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는 지금 당장 그들로 하여금 가톨릭교회를 떠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거기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에 뭔가 분열을 일으키고 그들의 마음 안에서 종국적으로 교회와 신앙을 등지게끔 하는 잠재적 씨앗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아시아교회를 탄생시킨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모범 안에서 근원적인 반성을 해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선택은 그 시대의 모든 박해와 탄압을 거슬러 내린 용감한 결단이었으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특히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몰이해와 버림을 받음에도 굴하지 않은 결과였다.

한국의 경우, 당대의 지배적인 유교 질서 안에 태어나 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 목숨을 바쳐서까지 이를 고백하였던 순교자들의 정신 안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윤리적·문화적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교회의 번영은 순교자들이 피로써 뿌렸던 씨앗이 자라나 지금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결과이다. 오늘날 과거와 같은 물리적 박해와 탄압은 없지만, 오히려 더 무서운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만연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어떻게 우리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재발견하여 오늘의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전과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는 아시아교회 구성원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보다 구체적으로, 특히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청소년사목과 종교교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젊은이들이 삶과 신앙의 통합적 차원에서, 즉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을 삶의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청소년사목과 교리교육에는 신앙과 삶의 역동성을 체험케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만남 통해 감명 받고 변화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만남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구체적 삶 안에서 진정성 있게 신앙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감명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 어른들이야말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세속적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부정적 본보기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제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아시아 젊은이들의 진정한 스승과 부모로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함께 기도하며 깨어나야 할 시간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13일, 정리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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