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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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66: 프란치스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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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24 ㅣ No.1709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6 · 끝) 프란치스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깨달아

 

 

성 프란치스코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달았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 상처로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와 회복을 이루었다. 지오토,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장례’, 프레스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성경과 교회 문헌,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함의 회복’ 혹은 ‘성화’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혹은 ‘그리스도(하느님)로의 변모’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간략하게 말해서 예수님과 복음의 인격으로의 변모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사료 중 하나인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프란치스코의 십자가에 대한 신심과 오상 사건을 이렇게 연결 짓고 있다.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 프란치스코는 덜덜 떨며 적잖이 놀랐고 이 말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복종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이 명령을 완수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그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한 애처로움이 그의 거룩한 영혼에 뿌리를 내렸고, 아직 살에는 찍히지 않았지만 경의(敬意)로운 오상이 그의 마음속 깊이 찍혔음을 경건히 추측할 수 있었다.”(「II 첼라노」 10항)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화해이자 일치이며 회복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온전한 사랑으로 쓰러져 가는 인간의 본성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그분과 또한 인간 상호 간의 화해를 완성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프란치스코가 십자가로부터 하느님 집의 “회복” 혹은 “보수”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매일 바라보며 살아가는 십자가는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주의와 정성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프란치스칸 문학 작품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격렬하게 우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사랑이신 분이 사랑받지 못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먼저 사랑을 주신 분, 곧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응답을 불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울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첫째로 ‘육화’가, 두 번째로 ‘창조’가 영성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압도적이고도 주도적인 사랑에 응답하는 영성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사랑을 깨달았고,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 상처가 새겨졌다는 것은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와 회복을 이룬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분이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인간 전체를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과의 일치와 회복을 이룬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성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변화의 선택)

 

부활 신비의 심장부로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였다. 삶의 최종적인 장애물인 죽음의 개념 자체를 죽음에 부쳤고, 죽음이 지닌 변모와 구원의 체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목적을 두 가지 방법으로 성취하셨다. 그분은 자기 죽음과 부활로써 죽음과 온 인류의 죄를 이긴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의 동일화를 통해서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생명을 방해하는 의도들과 행위들을 죽이겠다고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사랑에 사랑의 응답을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인간적 경향(죄)들을 미워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9,23)라고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신의 육신을 그 격정과 욕망과 더불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 5,24)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나눔을 간략히 결론짓고자 한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겪는 환난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환난이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13; 16-21)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21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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