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믿음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04 ㅣ No.782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믿음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전에 사목을 하던 본당에서 구역 반장으로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시던 한 자매님이 갑자기 몸이 아파 입원을 했습니다. 그 반장님은 레지오 단원으로도 열심히 봉사하셔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자매님이 검사 결과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수술을 앞둔 그 자매님에게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신자들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불과 얼마 사이에 얼굴은 창백하고 핼쑥해졌고 체중이 급격하게 감소해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습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나와 함께 씩씩하게 가정방문을 다녔던 분이라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를 보자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우리 일행에게 미소를 지어 보려 노력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이 흐를까 봐 뒤돌아서 연신 주절주절 다른 가족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나는 그분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병자성사와 기도를 간신히 끝냈습니다. 그 병실에는 대여섯 명의 환자분들이 함께 계셔서 나와 신자들이 혹시 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나는 기도가 끝나고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분들에게 일일이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누워 있던 한 아주머니가 그 자매님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분이 우리를 위해 낮이나 밤이나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종교는 없지만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나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아픈 처지에서도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매님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자매님! 이제 마음 편하게 계세요. 기도할께요” 그 자매는 힘없는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신부님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구역 일도 밀려있는데 다른 자매님들에게 죄송합니다. 오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분의 눈에 자꾸 이슬이 맺혀 일어서 나왔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던 그 자매는 병사성사를 마치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선행

 

고통을 겪어 보지 않고는 다른 이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선행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도 많이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단 몇 초라도 그녀의 두 손을 왜 꼬옥 잡아주지 못했을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부서질 것 같은 그분의 어깨를 왜 안아주지 못했을까. 병에 걸려 아픈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나는 그로부터 20여 년 후에 병원에 입원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수술 시간을 기다리면서 점점 더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때 한 자매님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신부님, 저는 병원 근처 본당의 레지오 단원입니다. 매주 하루씩 수술실 기도 봉사를 나옵니다. 기도를 해드릴까요?”

 

“네. 고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성호를 긋고 눈을 감고 누워 그 자매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자매님은 또박또박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나는 기도 후에 그 자매님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도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그럼 수술 잘 받으시고 나오세요. 건강하세요. 다 잘될 거예요.”

 

그런데 그분과 기도 후 내 마음속에 꽉 차 있던 불안한 마음이 한순간에 싹 사라졌습니다. 불안하던 내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지고 안정이 되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하는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말없이 손을 잡아 주던 의사 선생님, 지나면서 웃으며 안부를 물어보는 간호사 선생님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봉사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사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는 아픈 분들은 똑같을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장맛비에 쓸려가면서 풀뿌리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치는 절박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나는 전에 병자나 환자들을 방문했을 때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머리로 아니라 가슴으로 그들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그때 정말 후회가 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하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그 고통의 실재에 대해 잘 모르고 깊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과 몸으로 뼈저리게 체험한 것은 전혀 다릅니다. 병원에 방문하여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는 것은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부활을 희망하기에 우리 신앙의 본질은 희망

 

우리 주변에는 “괜찮아”라는 따듯한 말 한마디로 힘들지만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절벽에 마주 서게 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는 절망과 좌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본질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를 지나면 희망의 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지만, 그 고통을 이겨낼 희망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희망으로 고통을 이겨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 희망의 바다에 배를 띄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병원에서 수고하는 의료진들과 환자분들, 가족들, 봉사자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2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81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