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가톨릭 교리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움(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 2)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02 ㅣ No.4536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움(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 2)

 

 

아침에 미사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할 때면 다짐을 하곤 합니다. “오늘 하루 주변 사람들에게 말과 행위로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지요. 일상을 살다 보면 불편한 말과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기도 하고,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단죄하기도 하며, 오만하고 경솔한 행동과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니까요. 나 자신이 지은 죄 앞에 무너졌다가도 다시 기도로 일어서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반복적인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악과 죄는 일찍부터 큰 문제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세상을 선신과 악신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마니교에 맞서 대항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평생 고뇌했습니다. 그는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실체가 아니고 선의 결핍(privatio boni)에 불과하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정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 삶과 관련된 이 문제는 여전히 어렵고 복잡한 게 사실입니다.

 

죄와 마주칠 때마다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악은 왜 만드셨을까? 완전한 선을 추구하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불의를 용납하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또한 들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악의 문제를 다룰 때 자유라는 개념이 연결되어 뒤따라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세상을 한 가지 일변도로 생각해 만드셨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자유로움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자유를, 선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죄를 짓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죄악의 굴레가 바로 우리가 매일 경험하게 되는 한계 체험이지요. 죄는 그 자체로 좋지 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타인과 세상에 피해를 주기도 하기에, 우리는 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유로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자유로움은 바로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속죄를 통한 용서에서 비롯됩니다.(에페 1,7 참조)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지 않고서는 본연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속’(profanus)보다는 신앙에 충실하며 자유로움 안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을 인간이 되도록 하심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죄악의 굴레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로 손상된 인간의 고귀한 형상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본래의 존엄한 지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합니다.(사목헌장 22항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형언할 수 없이 큰 사랑을 무상으로 선물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화해로 세상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지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그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자유도 충만한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자유와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서울주보 5면,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2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