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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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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5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빛나는 어두움


[본문]

 

모세가 어둠 속에 들어간 것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야기는 모세가 처음 하느님을 만났을 때와 다소 상충되는 것 같다. 하느님께서는 그 때에는 빛 속에서였지만 지금은 어두움 속에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숙고하는 영적인 실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일관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점을 통해 성서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종교적 인식이 다가올 때 제일 먼저 빛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빛은 어두움인 불경과 반대편에 위치하며, 어두움은 빛의 감미로움을 통해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크고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인식한 것을 풍요롭게 관상할수록 신적인 본성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긴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분」 그리고 「깨달을 수 없는 분」에게 다가가면서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뵙는다. 사실 정신이 찾고자 하는 그분에 대한 인식이나 정신이 지닐 수 있는 참된 시각은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바라보는 데 있다. 정신이 찾고 있는 그분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마치 어두움 속에 있듯이 그분의 불이해성을 통해 모든 것과 분리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나는 어두움 속으로 스며들었던 신비가 요한은, 이러한 부정을 통해 신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지적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다가설 수 없는 것임을 정의하면서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 18)고 말한다.

 

「모세의 생애」 162~163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


[해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숨쉬는 터키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이방인 개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그리스도인)」란 이름을 얻었던 곳 안티오키아. 순교를 앞 둔 이냐티우스의 뜨거운 교회 사랑이 숨쉬는 곳. 그 곳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평원을 가로지른다. 높은 산맥 속의 굽은 길로 한참 오르다보면 갑자기 새로운 평원 고원지대를 만난다. 마치 하늘을 맞대고 있는 듯 모든 산천이 신비스러운 카파도키아가 한 눈에 펼쳐진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335년에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유복한 신자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수도자였던 누이 마크리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내면적인 영적 생활에 흠뻑 젖는다. 니사의 주교로 임명되어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에 관한 중요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451)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전 그리스 철학을 종합한 신학자로서 관상적 신비주의 신학에 큰 공헌을 한다.

 

「모세의 생애」(De vita Moysis)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히스토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첫째 부분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따른 모세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으며, 테오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두 번째 부분은 모세의 생애에 대한 관상(contemplatio)이 기술된다. 위의 본문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에 대한 관상 부분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오늘날, 참된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 갈증을 느낄 수 있다. 이 갈증의 해소를 위해 「구심기도」, 「향심기도」, 「관상기도」, 「렉시오 디비나」 등 많은 것을 찾게 된다. 이를 잠시 뒤로 하고 살아있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보자. 『세례 받을 때 빛 속에 있었던 내가 왜 지금은 어두움 속에 있는지?』, 『왜 영적 실제들은 일관성이 없는지?』 그에게 나지막이 물어보자. 

 

그레고리우스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먼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겨라』(「모세의 생애」 163)고 답한다. 그리고 마치 『모세가 이전에 받았던 같은 가르침을 어두움을 통해 받았듯이, 거룩한 말씀의 증언을 통한 가르침을 굳게 믿어라』(「모세의 생애」 165)고 충고한다. 또한 『거룩한 말씀이 보호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들이 아는 것 중 어느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적인 본성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해력을 통해 형성된 모든 개념은 오직 하느님의 우상을 만들뿐 결코 이에 대한 진실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모세의 생애」 165)을 일깨운다.

 

우리가 영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의 우상만을 만든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어리석은가! 그레고리우스는 관상 기도를 통해 쌓은 것을 그대로 내버리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주님의 산으로 오르라고 권고한다.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참된 영적 생활을 위해 덕스러운 인간의 삶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느님에게 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올바름과 관계된다. 사실 풍습의 순수함은 종교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방금 전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이 앎은 인간적인 인식 방법과 비교하여 그분에 대한 어떤 관념도 품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우리가 배워야 할 덕의 또 다른 형태는 덕스런 삶은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모세의 생애」 166).

 

아직도 「어두운 어두움」 속에 있다면,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빛나는 어두움」에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마음의 귀가 밝은 사람은 그 소리를 듣는다』(「모세의 생애」 169).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7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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