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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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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7: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참회에 관한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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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6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7)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참회에 관한 설교’에서

 

 

어머니 교회


[본문]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그대의 죄를 드러내십시오.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행하였나이다』(시편 50, 6). 그러면 그대의 죄는 용서받을 것입니다.

 

「참회에 관한 설교」 3장 4절

 

 

교회, 단죄가 아닌 치유하는 곳


[해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년) 교부는 신구약성서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성서를 깊이 묵상하였다. 훗날 사제가 되어 행한 그의 강론은 신자들의 마음에 진한 감동을 남겨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명예로운 덧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타락한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고 황실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귀양길에서 객사했다.

 

우리 교회가 규정과 규율만을 강조한 채 허약하고 상처 입은 신자들을 어머니처럼 껴안지 못할 때, 교회 안에는 반복음적인 엄격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깨어진 가정으로 말미암아 힘겹게 살아가는 이혼자들을 더 큰 애정으로 끌어안기보다, 오히려 「장애」(=조당, impedimentum)에 걸어 교회 법정에 넘겨버리는 오늘의 현실은 엄격주의 교회론의 현대적인 부활처럼 느껴진다. 

 

또 주일 미사에 빠지는 「대죄」를 지은 수많은 중죄인들(?)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찬의 식탁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성찬의 참뜻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성찬은 그야말로 사랑의 성사이며 용서의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더불어 나눈 식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나타내는 명백한 징표였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성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용서를 보증해 주시는 것이다. 최후만찬에 대한 마태오의 기록도 죄사함(『죄를 용서해 주려고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마태 26, 26). 

 

우리는 이 사랑의 식탁에 나아가기 위하여 미사 첫머리에,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던 세리처럼(루가 18, 13) 가슴을 치며 죄의 용서를 청한다. 

 

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면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며, 우리 죄를 헤아리기보다 당신 자비와 용서를 믿고 바라는 교회를 굽어보십사 기도한다. 

 

영성체 직전에는 주님의 자비를 다시금 간청한 후, 비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이지만, 주님의 한 말씀으로 죄와 허물에 병든 우리 영혼이 당장 낫게 되리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이토록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당신 자녀를 하느님께서는 성찬의 식탁에서 내치실까? 

 

성찬 식탁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당신 자신을 식탁의 선물로 내어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 식탁에 모여드는 사람이 죄인이라 하여 가로막는 일을 과연 그리스도께서 원하실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교회의 참회제도와 규정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서서히 등장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천해 왔다면, 신자들이 더 이상 불필요한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은혜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현행 참회제도를 다듬어가는 일은 절박하기 짝이 없다.

 

주님께서 불러 모으신 교회는 모든 이에게 열린 공동체였다. 죄인과 세리, 병자와 거지, 무식쟁이와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어우러진 공동체였다. 그들도 하느님의 소중한 아들딸이라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자리였고,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곳이었으며, 넘쳐흐르는 새로움의 은총으로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부활의 장소였다. 

 

죄인과 창녀의 벗이 되어주시고, 지치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시며, 길 잃은 양들에게는 착한 목자가 되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는 법정이 아니라,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불러왔다. 당신 자녀들을 밥해 먹이고, 똥오줌을 닦아 주고, 더럽혀 놓은 옷을 빨래해 주고, 때와 허물을 청소해 주는 고마운 어머니로 우리 교회를 여겨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뻐기고 벌주고 감독하고 훈계만 하는 팥쥐 어멈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했다가도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어머니! 이 어머니가 바로 교부들이 우리에게 일러준 『자모(慈母)이신 교회』, 『어머니 교회』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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