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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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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교육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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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7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교육자’에서

 

 

부의 올바른 사용


[본문]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왜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오? 내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을 왜 즐기지 말아야 한단 말이오?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오?』

 

하느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먼저 물과 공기와 같이 꼭 필요한 것을 모든 이에게 완전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한편 그분은 필요하지 않은 것은 땅과 물 밑에 숨기셨습니다. 이 때문에 개미들은 금을 찾아 파고, 독수리들은 금을 지키며, 바다는 진주를 숨겼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것을 나누어 주시고, 모든 인간이 서로 돕도록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 우리 세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공동 소유이고,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위하여 더 많이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나는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는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을 왜 즐기지 말아야 하느냐?』라는 말은 인간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습니다. 다음의 말이 사랑에 더 어울립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왜 나누지 말아야 합니까?』 그러한 사람은 『네 자신보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지킨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된 즐거움이며, 하늘에 보물로 쌓여 있는 재화입니다. … 한 사람이 호화스럽게 살고 많은 사람이 궁핍에 처해 있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자신의 재산을 보석이나 금보다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입니까? 생명이 없는 장식보다 당신의 삶을 꾸며주는 친구들을 얻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육자」 2,119,2-120

 

 

선행과 나눔은 필연적 의무


[해설]

 

교부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이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재화의 소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자연법 성격을 지니는 개인의 권리라 하더라도 필요에 따라 제한을 받는 권리이다. 곧, 재화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재화 본디의 특성이며, 그 궁극적 목적은 공동선이다. 

 

실로 교부들은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의무를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가르치면서 선행과 나눔은 부자의 의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무 사항이라고 강조하였다.

 

변함없는 전통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처음부터 공동체 삶의 일부였으며,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별한 점은, 공동체가 철저히 미사를 중심으로 모였다는 데 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공경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그들 모임의 본질을 나타내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그들이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듯이 성찬은 새로운 계명의 전형인 가난한 이들의 돌봄과 밀접히 연결되었다. 곧, 이웃에 대한 배려는 하느님 공경과 분리되지 않고 가장 내면적으로 성찬례와 연결되었다. 

 

본디 성찬례도 사랑의 식사라는 특성을 지녔지만, 공동체의 모든 신자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이 축제에 규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성찬의 식사는 전례적으로 추상화하여 재현되고 가능한 한 단순한 예식으로 간소화되었다. 

 

따라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올바로 모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현존인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고(마태 25, 40 참조) 강조하면서, 성사, 특히 성찬례와 사랑의 실천이 일치되지 않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었는가? 수도자들의 두드러진 활동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닌 것 같다. 

 

교회는 점점 더 외적인 성장과 발전에 몰두하여 교회의 본질인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의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인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인성보다 신성 강조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사랑보다 성사를, 인간의 아들보다 하느님의 아들을 더 강조하였다. 두 요소 모두가 사랑과 존경을 똑같이 받아야 하는데도 한쪽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려하지 않는 절름발이 신앙인을 양산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지금이라도 성사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성사와 사랑의 실천이 철저하게 보완되는 체계로 나가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전례와 삶이 일치하는 고대 교회 공동체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31일,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 · 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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